종이 호랑이 '평화유지군' 발톱 세워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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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냉전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세계는 평화롭지 않다. 분쟁 건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1992년 51개 지역분쟁이 일어나 '20세기 최다' 를 기록했다. 97년 29개로 최저를 기록했다가 그후 다시 늘어나 현재 세계 35개 지역에서 분쟁이 계속 중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존재는 유엔뿐이다. 지난 6~8일 열린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정상들은 이구동성으로 평화유지활동(PKO)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안전보장이사회에 소속된 15개국 정상들은 따로 만나 PKO에 대한 인적.재정적 지원을 늘리기로 합의했다. 정상회의에 이어 12일 개막된 올해 유엔총회에서도 PKO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PKO는 유엔의 핵심 사업이다. 세계 분쟁지역엔 하늘색 베레모를 쓴 유엔평화유지군(PKF)이 파견돼 있다.

유엔은 48년 PKO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53개 PKO를 수행해왔다. 이 가운데 40개는 88년 이후 발생한 것이다.

현재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동티모르에 이르기까지 14개 지역에서 3만7천3백50명의 PKF 요원이 활동하고 있다.

과거 PKO는 분쟁지역 휴전감시가 주(主)였다. 그러나 냉전종식 후 내전이 빈발하면서 휴전감시뿐 아니라 공정선거를 통한 정부수립, 난민보호 등 보다 적극적인 임무가 추가됐다.

PKO에 대해 분쟁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며, 자위(自衛)를 넘는 무력행사까지 인정된다. 이같은 새로운 형태의 PKO를 '다기능형 PKO' 라고 부른다.

다기능형 PKO엔 문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요원 확보와 경비 조달이다. 유엔은 상비군이 없어 회원국들로부터 병력을 제공받다 보니 요원의 자질부족, 지휘계통 혼란이 일어난다.

과다한 경비도 문제다. 유엔은 PKO에 연간 20억달러 이상 쓰고 있다. PKO 경비는 각국의 통상 분담금과 별도로 거두는 데 분담금 조차 잘 걷히지 않는 지금으로선 큰 부담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PKO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얼마 전 시에라리온에선 PKF 5백여명이 반군 포로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돈이 부족해 인근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요원들을 급히 조달하다 보니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장비가 빈약해 반군 수준의 전투력도 갖추지 못한 '저질 PKF' 란 평을 듣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PKO 지역차별이라고 비판한다. 유럽의 뒷마당인 코소보에는 PKF 4천명이 파견돼 연간 4억5천만달러의 예산을 쓰고 있을 뿐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시에라리온.콩고.서부 사하라 등 아프리카에는 급료도 형편없이 낮고 빈약한 장비에 훈련이 부족한 오합지졸이 파견돼 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때맞춰 PKO 개선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PKO 기능을 향상시키기엔 부족하다는 평이다.

전문가들은 근본대책으로 유엔 상비군 창설을 주장한다. 평소 훈련된 PKF를 유지하고 있다가 유사시 신속히 투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상비군안(案)에 반대다. 자국군을 유엔 지휘하에 두지 않으려는 것과 경비 부담을 피하려는 것이 주된 이유다.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입으로는 PKO 강화를 외쳤지만 실제로 병력을 제공하고 돈을 내는 데는 인색하다. 유엔의 PKO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강대국들의 언행일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정우량 국제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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