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정치 手읽기] 兵不血刃의 묘수는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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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국 원(元)나라 때의 바둑 고전인 현현기경(玄玄棋經)에 대면천리세(對面千里勢)란 묘수풀이가 나온다. 돌들이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도 단 한 수로 마음이 통하게 한다는 사활문제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천리 만리 평행선을 달리며 대치하고 있다. 이들의 대면천리세를 단 한 수로 무너뜨릴 묘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

현현기경에는 일장입공세(一將立功勢)란 묘수풀이도 나온다. 흑진 속에 갇혀 있는 백 한 점이 큰 공을 세워 흑을 전멸시키는 내용이다.

이 사활문제를 보며 문득 JP(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의 날카로운 한 수가 떠오른다. 그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한수를 던져 자민련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한 수는 일파만파로 영향을 미치더니 민주당이 코너에 몰렸고 한나라당이 장외로 나갔다.

잇따른 사건들이 겹쳐 사태는 더욱 악화됐고 국회는 정기국회 개회식만 치르고 또 다시 문을 닫아걸었다. 의회정치가 전멸 위기를 맞은 것이다.

정치인은 누구나 공을 세워 명성을 얻고 싶어한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것이 첫째임을 모르는 이 없지만 현실은 우선 당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을 세우도록 만든다.

한나라당이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보다 당을 위해서다. 민주당이 많은 의혹에 고개를 돌린 채 모르쇠로 일관해온 것 역시 나라가 아니라 당과 당의 인사들을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밀려가다가 어느 시점에 대권전쟁이 시작되면 곧장 나라가 아수라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온 강토가 전쟁에 휩싸였네/백성들이 무슨 수로 생업을 즐길 수가 있겠는가

그대에게 부탁하노니/제발 공세워 제후된다는 말 하지 마오

한명의 장군이 공 세워 제후되는 그늘에/수많은 병사들의 뼈가 말라간다오

(澤國江山入戰圖/生民河事樂樵蘇/憑君莫話封候事/一將功成萬骨枯)

앞서 나온 '일장입공' 의 원전이 되는 시인데 정치인들의 싸움에 백성들이 골병이 드는 오늘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제3의 오일쇼크에다 의사파업, 주가폭락에 각종 의혹으로 백성들의 마음은 불안하고 위기감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밀리면 죽는다' 며 버티고만 있다. 지긋지긋한 버티기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 몰라도 그 승리를 위해 백성들의 뼈가 하루하루 말라간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국회에서 마주 앉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들은 직업이 국회의원이니까 남북문제든 대출압력 의혹이든 국회에서 풀어야 맞다.

바둑으로 치면 지금 양당은 공식 대국을 두다 만 상황이고 대국장엔 훈수꾼과 해설자만 가득 모여 앞으로의 전망을 내놓고 있는데 그나마 각양각색이어서 보는 이들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민주당 소장의원들의 '독자행동' 은 이런 교착상태를 푸는 한가닥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묘수 아닌 묘수가 됐다.

권력누수가 두려워 숨죽이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당 수뇌부로서는 기막힌 자충수로 보이겠으나 판 전체로는 오히려 국면전환의 돌파구를 훌륭히 열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이 탐색 중인 수습책과 이에 따른 한나라당의 응수가 미묘하게 반응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명분에 만족할까, 아니면 유리해진 판세에 쾌재를 부르며 더욱 밀어붙이려 할까.

현현기경의 병불혈인세(兵不血刃勢)는 피흘리는 싸움 대신 스스로 삶의 길을 찾아 승리하는 왕도(王道)의 용병술을 보여준다.

지금 양당은 서로 치명상을 주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지만 실은 이 시점이야말로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병불혈인(兵不血刃)의 계책이 절실하다 하겠다.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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