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박정희-김정일-이명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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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 위원장은 제 부친이 나라를 발전시킨 것에 대해 굉장히 평가하는 얘기를 했어요.” 박 의원의 설명이다. 최근 정부의 한 소식통은 당시 김정일이 서울에 올 경우 박 대통령 묘소를 꼭 참배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당시도 박 의원은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였다. 이 때문에 그의 방북을 두고 남쪽 대선에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북측의 고도의 정치 쇼라는 등 해석이 분분했다. 그러나 남북 간 경제 격차를 실감하고 있는 김정일의 입장이고 보면 남북 간 경제력을 역전시킨 신화의 주인공에 대해 관심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개발 독재로 산업화에 성공한 박정희식 마법을 배워 북한의 헐벗음을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북한이 잇따른 유화적 몸짓을 보이고 있지만 이명박(MB) 대통령은 바위처럼 움쩍 않고 있다. 일부에선 그 이유를 MB가 매파들에게 포위돼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대북 관계에서 원칙을 강조하고, 이벤트성 정상회담은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어온 지금까지의 MB 대북정책은 나름대로 평가받을 만하다. 한반도 비핵화야말로 촌보(寸步)도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인 점도 맞다. 합의했다 파기하고 뒤로는 핵무기나 만지작거리는 도돌이표 회담은 무의미하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다. 그런 단호함에 보수층은 큰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남북 문제를 지금 같은 교착상태로 마냥 방치할 순 없다. 일부에선 북한 내부가 큰 어려움과 혼란상태에 빠져 곧 큰 사태로 이어질 것이라고 점치며 그때까지 대북 강경태도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과 화폐개혁 등으로 어려움이 크다는 사실은 맞다. 그렇다고 북한 정권이 곧 붕괴될 것이란 예측은 북한 내부 사정을 한참 모르고 하는 소리다. 몇십만 명이 아사(餓死)할 정도로 지금보다 더 혹독하던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 시절도 버텨낸 북한이다. 혹 북한이 당장 붕괴한다면 남북 간 국민총소득 차이가 38대1인 상황을 감안할 때 남한엔 끔찍한 재앙이다.

북한 붕괴 시나리오에 대한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하더라도 한편으론 남북 관계를 새롭게 펼쳐나갈 활로를 개척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미래를 책임지는 지도자다. 원칙만 강조하며 손 놓고 있는 건 민족사적 관점에서 볼 때 퇴보요 직무유기다. 어쩌면 북한이 궁지에 몰려 있는 지금이야말로 남북 문제에 새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적기(適期)일 수 있다. 특히 김정일의 건강을 고려하면 그가 건재할 때 남북 관계에 일정한 진전을 이뤄야 할 필요성도 있다. 북한 내부에서 신(神)이나 다름없는 김정일이야말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또한 가장 실효적 협상 상대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후계 다툼이 치열할 경우 협상 파트너를 찾지 못해 대화 복원까지 5~1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김 이후 전쟁 같은 최악의 상태를 미리 막기 위해서도 북한을 관리할 수 있는 끈을 확보해야 한다. 남북 간 큰 틀의 로드맵이 필요한 이유다.

남북 정상회담을 거론할 수 있는 지렛대는 무엇보다 MB에 대한 보수층의 믿음에 있다. 사실 지난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대화 개시라는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뒷심을 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보수층의 반발이었다. 퍼주기 논란에다 이용만 당했다는 등 매운 비판이 쏟아지며 남은 것은 남남 갈등뿐이었다. MB는 최소한 ‘이용만 당하는’ 회담은 하지 않을 것이란 묵시적 믿음을 심어줬다. 이제 그 원동력을 바탕으로 실적을 만들 때다. 핵 포기를 설득하기 위해서도 회담은 유효한 수단이다.

MB는 또한 김정일이 배우고 싶어 하는 박정희의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장 주역이었다. 한 수 배우고 싶은 상대가 틀림없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담당보좌관을 지낸 빅터 차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김정일은 과거 어느 한국 대통령보다도 비즈니스맨 출신인 MB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진단했다.

화통한 성격의 김정일과 원칙·실용으로 무장한 MB. 두 사람의 만남이 궁금하지 않은가. 예전과 다른 뭔가 실질적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고 기대된다. 연말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MB의 위상을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도 남북 간 관계개선은 훌륭한 밑반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과제가 어디 세종시 문제뿐인가.

허남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