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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50대여 새 꿈을 꾸어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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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추석 연휴도 지나고 남들은 다시 분주해졌다지만 50대 초반의 P씨는 굳이 바쁠 일이 없다. 출근할 일도, 그렇다고 누굴 만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P씨는 오늘부터 시작될 올림픽 중계를 빼놓지 않고 볼 요량으로 신문의 방송편성표를 평소보다 더 눈여겨 본다.

명문고.일류대를 나와 일찌감치 재무통으로 회사에 자리잡고 이사.상무.전무로 고속승진의 화려함도 누린 P씨는 더 이상 올라갈 길이 없다고 판단하자 미련없이 회사를 나온 뒤 친구로부터 인수한 기업으로 사업도 해 보았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IMF 때문에 갖고 있던 돈만 날린 채 정리해야 했다.

50대 후반의 K씨는 아직 현역이다. 그러나 그 역시 몇해 전 일단 퇴사한 후 지금은 언론사 논설위원실에서 촉탁형식으로 일하고 있다.

이미 나이찬 딸과 아들을 시집.장가보낼 때까지만이라도 버텨보자는 생각이다. 그런데 얼마 전 식당에서 오랜만에 만난 옛 동료에게 "지금 어디 있어?" 라고 엉겹결에 물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친구는 겸연쩍게 "내가 연락할께" 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식당문을 나섰다. 사실 식당이나 찻집에서 50대끼리 만나 인사를 나누다 "지금 어디 있어?" 라든지 "어디로 연락하면 돼?" 라고 묻는 것은 이제 실례에 속한다. 50대의 연락처 중 태반이 011, 016, 019 등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50대 중반의 L씨는 현역에서 물러난 지 몇해 됐지만 여전히 골프치며 소일하는 팔자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요즘엔 함께 골프 칠 사람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검찰이다, 관료다, 언론이다, 재계다 하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있어 함께 골프도 치고 은근히 동류의식도 즐겼는데 이젠 거의 다 옷을 벗었다. 신문의 인사동정란을 봐도 아는 사람 이름 찾기가 가물에 콩나기다.

역시 50대 관료인 Y씨는 지방대 출신에다 늦깎이로 고시에 붙어 승진이 늦었던 것이 오히려 지금은 다행이란 생각이다.

그러나 그도 더 이상 갈 자리가 마땅치 않아 외곽을 전전하고 있다. 또 한 때 잘 나가던 S씨는 50대에 들어서 실직과 이혼이란 두개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다. 아이들마저 독립한 요즘 그는 혼자 50대의 길을 쓸쓸히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50대 인구는 약 4백35만 정도다. 전체 인구의 10분의 1수준이다. 그 중 50대 남자의 비중은 2백10만 정도로 같은 연령대의 여자보다 약간 적다.

남자에게 50대는 완숙의 나이다. 그러나 요즘 직장에서 50대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대기업 이사도 요즘은 40대가 더 많다. 검찰.법원.언론.관료사회도 대개 마찬가지다.

50대는 집에서도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못된다. 자식들과는 소원해지고 아내의 눈초리만 더욱 매섭게 느껴지는 그런 나이다. 건강에도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우스갯소리로 남자를 불에 비유하면 20대는 성냥불(빨리 붙고 빨리 꺼지기 때문), 30대는 장작불(더디 붙고 오래가기 때문), 40대는 담뱃불(빨아야 타기 때문), 그리고 50대는 반딧불(불도 아닌 것이 불인척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한국의 50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P씨는 닷컴기업의 대표이사로 새 자리를 잡을 계획이다.

그는 주식 때문에 익힌 컴퓨터 솜씨로 인터넷 장기와 바둑에 몰입했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며 웃는다.

K씨의 필봉은 여전히 날카롭다. 그는 그동안 써왔던 칼럼과 사설들을 묶어 책으로 낼 생각이다. 마무리가 아닌 중간점검으로 말이다.

S씨는 이민을 준비 중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자기 인생을 다시 한번 움켜쥐기로 한 것이다.

한국의 50대는 아직 늙을 때가 아니다. 지미 카터의 말처럼 "늙기 시작하는 것은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다. 그러니 한국의 50대들이여 새 꿈을 꿔라. 후회를 '빠떼루' 시킬 그런 꿈을 말이다.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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