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버크(1729~97)의 동상이 그의 모교인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더블린대학교로도 불린다)에 서있다. 정통 보수주의의 원조인 버크는 영국 정계에 진출해 29년간(1766~94) 하원의원으로서 의정생활을 했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반대했지만 미국독립혁명은 지지했다.
버크의 보수주의는 18세기 계몽주의의 과도한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 출발했다. 그는 여러 대에 걸친 인간 경험의 진수인 관행·전통·편견이, 한 세대나 한 개인의 추상적 이성보다 훨씬 깊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프랑스혁명을 반대한 것도 혁명 세력이 인민주권이라고 하는 ‘추상적 권리’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크는 ‘전통 속에서 구체화된 자유’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와 1688년의 명예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받아들였다. 버크는 종교개혁의 성과를 논하면서, 때때로 혁명적인 방법에 의하지 않고는 제거할 수 없는 악과 폐해가 과거에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종교개혁의 혁명적인 과정이 역사 발전의 위대한 순간이었음을 인정했다.
미국 독립혁명에 관한 버크의 태도는 보수주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인이 아니라 ‘영국 정부’라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영국인의 전통에 근거한 정당한 권리(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를 배반했고, 식민지인은 영국인의 후예로서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인의 기질을 이어받았으므로 마땅히 영국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은 보수주의의 ‘경전’에 해당하는 문헌이지만 광복 이후 60여 년 동안 우리말 번역이 없었다. 비유하자면 그동안 한국의 보수는 ‘한글 성경 없는 기독교’였던 셈이다. 2009년 봄 진보 성향의 한 서양사학자가 국내 최초로 이 책을 번역, 출간했다. 우리 사회의 척박한 지식 인프라와 보수의 지적 게으름을 동시에 확인해준 ‘사건’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인 1881년에 번역했다. 우리와는 128년 격차다. 번역을 통한 모국어 콘텐트의 확충이야말로 국격 높이기의 첫 단추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