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의료개혁 제대로 하자] 1. 왜곡된 제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캐나다 토론토의 교포 여행가이드 崔모(26)씨. 그는 최근 서울에서 치과 치료를 받고 돌아갔다.

崔씨는 "치료비.항공료.체재비 등을 다 합해도 미주보다 싸기 때문에 교포들이 한국에서 진료받는 일이 늘고 있다" 고 말했다.

반대로 외국에 나가 진료를 받는 환자도 적지 않다. 위 육종이 간으로 옮겨진 전직 공무원 조모(60)씨는 서울의 S대학병원에서 지난 2월 수술을 받았으나 항암 치료에 차도가 없어 6월말 미국 볼티모어의 병원으로 건너가 진료 및 신약 처방을 받고 귀국했다.

조씨 수술을 담당했던 교수는 "새로운 항암제나 치료법을 써보려 해도 의료보험서 인정을 못받기 때문에 환자를 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면서 "우리 병원에서 매년 암환자 30~40명이 외국으로 간다" 고 했다.

한국의 진료비가 싸다고 교포들이 입국해 진료를 받고, 질 낮은 서비스 때문에 국내 환자는 외국으로 나간다. 뭔가 꼬여도 한참 꼬였다.

의약분업을 계기로 곪아 있던 의약계의 문제점이 모두 드러나고 있다. 문제의 뿌리에 있는 두 기둥은 의약품 거래의 블랙마켓(음성적 수입구조)과 저부담, 저수가 체제인 '도움 안되는' 의료보험제도다.

리베이트 등 약품 판매에서의 떳떳지 못한 큰 마진으로 수익을 꾸려온 병.의원들은 의약분업으로 이 음성적(낮은 수가 때문에 어느 정도는 용인된) 소득원을 모두 날려버리는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약사들도 마진 좋은 조제약을 권하는 등의 편법 수익원을 잃게 됐다.

의료보험은 큰 병을 만난 환자에게는 구세주가 되지 못한다.

저수가를 의식한 의료진의 왜곡 진료로 환자들은 필수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등 진료의 질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 사라진 음성수입〓의사들이 지난해 11월 이후 거리로 뛰쳐나온 이유는 '배가 고프게 됐다' 는 것이었다.

정부가 의약분업 시행 전단계로 그 달 15일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償還)'제를 시행하면서 의료보험 약가를 30.7% 내린 때문이다.

이 조치로 연간 약값 마진 1조1천5백억원(보건복지부 추계)이 일시에 사라졌다.

정부는 대신 병.의원 수입의 최고 45.4%(내과)가 약값이라고 계산해 의보수가를 12.8% 올렸다.

지나친 약값 마진은 정부와 의료계가 묵시적으로 용인한 음성소득이었다. 정치.경제논리에 밀려 저수가를 고집해 왔던 정부는 수가 인상 대신 이를 용인해온 셈이다.

이 조치의 위력은 엄청났다. 연세대 의대 박은철 교수가 분석한 서울 종로구의 한 내과 개원의는 종전까지 월 매출액(2천3백94만원)의 57.7%를 약 판매에 의존했다. 약 판매액의 절반이나 되는 6백90만원이 수익이었다.

하지만 실거래가 상환제 이후 그의 월수입은 98만원으로 줄었다는 게 朴교수의 계산이다.

약값 마진이 수입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것을 이 개원의도 처음 알았고 정부도 "이 정도인 줄 몰랐다" 며 놀랐다.

정부는 지난 4월 6%의 수가를 더 올리며 의사들을 달랬지만 "그것으로도 벌충이 안된다" 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 '감기 의료보험' 〓5년여간 백혈병 치료를 받아온 金모(11)군의 부모는 연간 3천만~4천만원의 치료비 중 절반 가량을 본인이 부담해왔다.

법정 본인 부담금은 20%에 불과하지만 보험에서 인정하지 않는 진료가 많아 가정이 거덜날 지경이다.

서울중앙병원의 한 교수는 "백혈병 환자에게 적혈구 촉진제는 15일까지, 구토예방제는 하루에 두 알로 제한해 보험 인정을 해주기 때문에 비보험진료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마저도 중(重)질환에게 의보 혜택이 제대로 가지 않는 현상을 '감기(치료용)의료보험' 이란 말로 표현한다.

중환자가 아니라도 보험 혜택은 절반에도 못미친다. 최근 디스크 수술을 받은 K씨는 보험이 안되는 2인실 입원비.식대.선택 진료비 등으로 1백여만원 이상을 물었다. 보험으로 된 것은 수술비 중 27만원이었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김창엽 교수팀이 최근 전국 2백24개 병원을 대상으로 진료비를 조사한 결과 본인 부담비율이 평균 51.7%에 이르렀다.

현행 의료보험은 진료비 할인제에 불과하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라진 필수 서비스〓20년째 당뇨를 앓아온 金모(62.서울 신길동)씨는 최근 말기 간암 진단을 받았다.

복부에 혹이 있었으나 주치의가 한번도 배를 만져보지 않은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손으로 만져보는 촉진(觸診)은 사라진지 오래다.

S대 내과 전문의 K씨는 "진료 건수를 늘려야 수입이 돼 3분 진료를 해야하는 현실" 이라며 "환자가 진료대에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 촉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말했다.

S대병원 내과 Y교수는 "현행 제도는 상담이나 회진 등을 의료행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 길어지지 않도록 환자의 눈길을 피하는 실정" 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사회부〓강찬수.신성식.장정훈 기자

기획취재팀〓고현곤.이상렬.조민근 기자

정보과학부〓홍혜걸 전문기자.황세희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