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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선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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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99년 초 휼렛패커드(HP)가 회사 설립 이후 처음으로 외부에서 최고경영자(CEO)를 초대하기로 한 것은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HP가 성장 잠재력과 인력, 기술, 훌륭한 브랜드 등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회사를 한 단계 끌어올릴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루슨트 테크놀로지의 칼리 피오리나가 HP의 CEO로 뽑힌 것은 예상 밖이었다. 피오리나가 98년 포춘지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경영인'으로 뽑힌 스타 경영인이긴 하지만, 컴퓨터 분야에 전혀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CEO 선발을 책임진 HP의 이사 4명은 피오리나의 비전과 열정, 지도력에 높은 점수를 줬다. 피오리나는 특히 전술적인 목표를 세워 계획한 일이 실제로 이뤄지게 하는 능력을 평가받았다. HP의 숨은 실력자이며 선발위원 중 한명인 딕 핵본은 피오리나에 대해 "제2의 잭 웰치가 될 수도 있겠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피오리나는 주요 주주들의 반대를 이겨내며 HP와 컴팩의 합병을 성사시키는 등 HP의 부활을 주도하며 선발위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국내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이 새 은행장을 뽑고 있다. 이달 말 임기가 끝나는 김정태 행장은 지난달 징계를 받아 연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번 국민은행장 선임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새로운 경험이다. 지배주주가 없는 데다 김정태 행장 징계에 대한 여파로 정부나 권력층에서 입김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은 첫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은행 이사들은 지난 6월에 만들어진 6인 행장추천위원회를 해산하고 이사 전원이 참석하는 새 행추위를 구성하는 등 매끄럽지 않은 모습이다. 11일까지 최종 후보를 확정한다니 시간도 넉넉지 않다.

그래도 행추위 측은 정부나 정치권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실력 있는 인물을 독자적으로 선임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행추위 주장대로 국민은행장 선임 과정은 지배주주가 없는 금융회사의 CEO 선임에 대한 모범적 선례가 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새 행장이 설령 피오리나 같은 인물이 아니더라도 이러쿵저러쿵 뒷말을 하지 말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면 좋겠다. 그래야 국내에서도 CEO 시장이 만들어지고 한국의 피오리나가 나올 수 있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