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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설과 염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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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도시에서 눈은 천덕꾸러기다. 골목마다 한 자나 쌓였지만, 눈사람도 눈싸움도 겨울 정취도 없다. 녹다 말다 다시 얼어 잿빛으로 변한 폐기물 더미일 뿐. ‘눈은 살아 있다(…)/죽음을 잊은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김수영, ‘눈’) 하지만 콘크리트 숲 속 담담한 청소부에겐 ‘쌓이는 눈더미 앞에/나의 마음은 어둠’(고은, ‘눈길’)인가.

100년 만의 폭설에 염화칼슘만 각광받고 있다. 염화칼슘은 수분을 자신 무게의 14배까지 빨아들인다. 눈에 뿌리면 습기를 흡수하면서 녹는데, 이때 나오는 열이 주변의 눈을 다시 녹인다. 특히 염화칼슘에 녹은 물은 섭씨 영하 54.9도가 돼야 언다. 한파 속에서도 도로변이 얼지 않고 질척거리는 이유다.

염화칼슘은 1968년 동양화학에서 본격 생산됐다. 원래 이 회사의 주력 상품은 소다회다. 인공 조미료에서 유리·비누·화약까지 쓰임새가 다양한 금싸라기다. 염화칼슘은 이 소다회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생긴, 별로 쓸모없는 부산물일 뿐이었다. 그런 것이 69년 12월 10일 소금과 모래를 대신한 제설제로 등장한다. 서울에 4cm 눈이 쌓이자 삼각지와 청계천 고가도로 입구에 처음으로 살포된 것이다.

도로에나 뿌려지던 염화칼슘은 84년 안방으로 들어온다. ‘물 먹는 하마’다. 장마철 실내나 옷장의 제습제로 변신한 것이다. 수많은 ‘*** 하마’ 시리즈의 효시다. 최근엔 ‘돈 먹는 하마’란 말도 생겼다. 낮은 인구증가율의 주범이라나. 스산한 얘기다.

염화칼슘은 눈도 잘 녹이지만 부식성도 강하다. 소금의 1.3배다. 95년 성수대교 붕괴의 주범으로도 지목됐다. 눈 치우느라 매년 8t가량 뿌렸는데, 교량의 이음매 부위를 급속히 부식시켰다는 것이다. 지난해 통일로변 은행나무 100여 그루가 갈변증(褐變症)에 걸린 것도 염화칼슘 때문으로 밝혀졌다. 토양의 염도가 높아져 나무에서 자양분과 수분이 빠져나간 것이다. 문명의 산물은 이처럼 이기(利器)이면서 동시에 흉기(凶器)다.

그러고 보면 눈 치우는 데는 역시 넉가래와 빗자루다. 한 구석에 모으고 햇살을 기다리면 된다. 눈사람도 방법이다. ‘눈사람은 온 몸이 가슴이다/큰 가슴 위에 작은 가슴을 얹은 사람이다/그래서 그토록 빨리 녹는 것이다/흔적도 안 남는 것이다’(권혁웅, 『눈사람』). 그런데도 빨리 녹기를 재촉해야 하나. 입춘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박종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