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통문관 주인 이겸노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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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3박4일간 나 역시 연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그 감격과 회한의 순간들을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 하고 많은 사연들 중에서 내가 뜻밖의 감동을 받은 것은 통문관 주인 이겸노(李謙魯)옹이 북한의 국어학자 유열 교수를 롯데민속관 앞에서 만나 55년 전 통문관에서 출간한 유교수의 '농가월령가' 책 두 권과 원고료 50만원을 불쑥 건네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나는 역시 이겸노 선생답다고 무릎을 쳤다.

李옹은 올해 91세. 그는 이산가족은 아니지만 평남 용강 출신인 실향민인지라 또다른 외로움이 있는 분이다. 일찍이 해방 전부터 고서점을 경영하면서 오직 책과 함께 일생을 살아오셨다. 당신이 쓴 '책방비화(冊房秘話)' 를 보면 책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이 나온다.

"동빈(東濱) 김상기(金庠基)선생이 어느 책을 찾는데…" 하면서 시작하는 그의 얘기 속에는 언제나 책과 학문과 인생의 훈훈한 향기가 어려 있다.

이겸노옹은 스스로 책방주인이라고 낮추고 있지만 그는 단순한 고서점 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의 고전과 전통문화를 책과 고문서를 통해 실현한 서지학자이고 누구보다 뛰어난 애서가였다.

이겸노옹은 6.25동란 중 폐허 속에 나뒹구는 책들을 구해내기 위해 어렵사리 도강증(渡江證)을 얻어 한강을 넘나들며 이를 수습하였다.

그는 다떨어진 책을 낱장마다 인두로 다리고, 풀을 먹여가며 스스로 장정해 살려냈다. 그렇게 하여 하마터면 빛도 못보고 사라질 뻔한 고문서.고서적을 구해낸 것이 얼마인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문학자마저 없던 우리나라 고활자.목판화.능화판(菱花板).시전지(詩箋紙) 같은 것을 손이 닿는 대로 종류별로 모아 하나의 장르로 제시하곤 했다.

영남대박물관이 자랑하고 있는 한국의 옛지도 8백50점도 통문관 수집품을 그대로 인수받은 것이었다.

이겸노옹은 책과 고문서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연구하고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모두 그의 벗이고 사랑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당신의 나이를 반으로 꺾어야만 동갑이 되는 나 같은 '젊은이' 에게도 그런 애정을 베풀고 있다.

하루는 학교 연구실에서 나는 李옹이 보낸 편지를 한통 받았다. 편지는 아름답고 고상한 시전지에 고어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주일이면 한 번, 못 돼도 한 달에 한번은 뵙던 얼굴인데, 이 봄이 다 가도록 만날 수 없었으니, 저술에 전념함이 깊으신 것인지 영남의 꽃이 좋아 아니 올라오심인지. 다름 아니오라 책을 정리하다가 우리 회화사 연구에 도움이 될 듯한 자료가 나와 한부 복사하여 동봉하오니 잘 엮어서 좋은 작품을 만드심이 어떠하실지. 부처님 얼굴 살찌고 아니고는 석수장이 손에 달렸다고 합니다. 하하하, 이만 총총. "

이겸노옹은 또 대단히 정확한 분이다. 남에게 진 신세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 당신께서 북에서 유열 교수가 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9순 노구로 지팡이를 짚고 롯데민속관 앞에서 군중 속에 한시간을 서서 기다리다 기어이 만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이한 미담(美談)으로 얘기하겠지만 사실 옹은 90평생을 한결같이 그런 마음으로 사셨던 것이다.

이겸노옹은 요즘도 아침이면 인사동 통문관 2층 상암산방(裳巖山房)에 나와 헌 책과 고문서를 매만진다.

당신의 옥인동 댁이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 있어 붙인 이름이다. 어느 날 내가 치마산방에서 李옹을 뵙고 그 변함없는 무심한 경지와 건강의 비결을 여쭤 보았더니 낡은 책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돌보아주던 책들이 내 노년을 이렇게 돌봐주고 있다오." 옹은 진실로 우리 시대의 귀감이요, 인간문화재이시다.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이겸노옹 같은 분이 한 하늘 아래 살고 있음을 많은 국민들이 알게 되었음은 망외(望外)의 기쁨이었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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