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상봉] 북 남편…남 아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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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여보, 미안하오. 그동안 힘들었지?"

"뭘요, 살아 있는 것만도 고맙소…. "

6.25때 헤어진 북의 남편과, 50년간 수절해온 남의 아내. 백년해로의 약속은 5년으로 끝나고 반백년이란 긴긴 이별의 시간들. 이제 노인이 돼서 부부는 다시 만났다.

아내 이춘자(李春子.71)씨는 상봉장에서 남편 李복연(73)씨와 눈이 마주치자 석고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움과 원망이 너무 깊었던 탓일까.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고통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50년전 네살.한살 난 두 아들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바로 그 야속한 남편이었다.

춘자씨는 "이웃집에 남자 옷이 걸려 있는 것만 봐도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면서 흐느꼈다.

두 아들 지걸(54).호걸(51)씨가 한참 후 "아버지!" 하며 울부짖었다.북에 아버지를 두고도 '애비없는 아들' 로 자라면서 겪은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올랐다.

복연씨는 "미안하다" 는 말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늙은 아내는 남편을 만난다는 설렘에 14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상봉장에 입고 갈 고운 옥색 한복에 혹시라도 구김이 갈까 옷걸이에 고이 걸어 놓았다.

아내는 옥색 보자기로 곱게 싼 상자에서 선물을 꺼냈다.열여섯에 찍은 결혼사진부터 모시 한복.금반지.금두꺼비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준비한 금가락지를 남편 손에 끼워줄 때는 새색시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아내는 "이제는 세상 무슨 일도 다 이해할 수 있다" 고 했다."북쪽 마누라 주라고 가져왔다" 면서 남녀 시계 한쌍도 내놓았다.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을 본다는 기쁨에 며칠전 고향 안동에서 소를 잡아 불고기 파티까지 열었다는 아내였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남편 복연씨는 1945년 결혼한 뒤 상경, 신문지국을 꾸리며 생활했다.5년후 6.25가 나자 남편은 아내와 두 아들을 먼저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이후 춘자씨는 50년 동안 행상.다과점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살았다.그래서 두 아들을 서울로 보내 대학까지 마치게 했다.

춘자씨는 "아들 둘이라도 남겨주고 가 고맙다" 면서 연신 눈물을 닦았다.

이경희.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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