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산가족 현대사] 上. 굴곡의 역사가 남긴 50년 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도쿄(東京)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1964년 10월 9일 도쿄 조선회관. 북한 육상선수로 출전한 신금단(辛今丹.당시 26세)씨와 딸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온 아버지 신문준(辛文濬.당시 49세.83년 사망)씨의 극적인 상봉이 있었다. 헤어진 지 15년 만이었다.

"아바지!" "금단아!" "오마니와 동생은 모두 잘 있어요. " "그래. 나도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단다."

부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 부둥켜 안은 채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들의 만남이 이뤄진 7분 동안 이를 지켜보던 남북한 관계자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이산가족은 식민지와 분단.전쟁이 남긴 유산이다. 개인과 가족의 헤어짐이 자의(自意)보다는 민족사의 소용돌이에서 비롯했다는 뜻이다. 다른 나라에선 보기 어려운 '한국형 이산가족' 이라고 할 수 있다.

◇발생 원인〓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비롯, 그 후 정치적 탄압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중국.일본 등지로 유랑길을 떠나면서 생겨난 경우다.

소련 영토에 거例構?있는 35만여명의 고려인, 중국에 살고 있는 1백50여만명의 조선족들이 바로 이 시기에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다음은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을 강제로 징용하면서 생겨난 경우다.

당시 38만여명의 한국인이 전쟁터로 끌려갔지만 이 가운데 약 15만명이 1953년까지 귀환하지 않았다.

39~45년 일본에 끌려간 징용자도 1백13만여명이지만 이 중 63만8천여명은 일본에 그대로 머물렀다.

이 와중에 적지 않은 이산가족이 생겼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규모 이산가족이 생긴 것은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다. 한국의 이산가족은 한국전쟁 3년을 계기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 것이다.

그 후 정부가 규정하고 있는 이산가족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즉, ▶8.15 이후 38선을 경계로 가족.친지의 왕래가 단절된 사람▶한국전쟁으로 월남 또는 월북해 가족과 헤어진 사람▶국군포로.납북자 등이다.

이북5도청 자료에 따르면 해방 직후부터 6.25 직전까지 남하한 북한주민은 무려 3백50만명에 달한다. 북한지역에 수립된 공산정권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이유였다.

평북 창성이 고향인 강영훈(姜英勳)전 국무총리는 "내가 해방 직후 월남을 결심한 것은 5개월 남짓 보고 겪은 공산체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 이라고 밝혔다.

반면 이 시기에 자진 월북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난해 8월 부자(父子)상봉 여부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씨의 아버지 이원철씨가 그런 경우로 李씨는 49년 월북한 육종(育種)학자다.

이문열씨는 그의 대표작 '영웅시대' '변경' 등에서 이데올로기로 상처받은 자신의 가족사를 소재로 삼았다.

◇6.25는 이산가족 대량 양산기〓50년 12월 압록강변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의 공세로 후퇴할 당시 함께 남하한 북한주민은 자그마치 1백만명에 달한다.

자료에 따르면 하룻동안 대동강 철교를 건넌 피란민만 5만명이 넘는다. 또 흥남.성진.진남포 등지에서는 무려 20만명이 배편으로 남하했다.

83년 서울 여의도 '만남의 광장' 에 빼곡이 적은 이산가족의 사연에서도 그 당시 헤어진 사람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밖에 53년 6월 반공포로로 석방된 2만7천여명과 우리 군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1만9천여명의 미송환 국군포로, 8만4천여명에 이르는 납북인사 등도 전쟁이 낳은 이산가족이다.

여기에 전쟁 중 행방불명된 30만3천명을 포함하면 이산가족의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납북자.비전향 장기수.북송교포〓전쟁 이후 납북된 민간인도 또 다른 이산가족이다. 납북자는 모두 4백54명으로 대부분 어부 출신이다.

북한측이 송환을 요구하는 비전향장기수도 북한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이라고 볼 수 있다.

법무부는 전향을 거부한 채 간첩죄 등으로 15년 이상 복역한 장기수 26명을, 송환추진위원회는 국가보안법.반공법 등으로 7년 이상 복역한 양심수 88명을 각각 비전향 장기수로 분류한다.

그밖에 59년 이후 12년간 북송된 약 9만명의 재일동포도 지금까지 가족과 헤어져 살고 있다.

쇠찌르레기 발가락에 가락지를 끼워 북한에 있는 아버지에게 안부를 전한 조류학자 원병오(元炳旿.경희대 교수)박사의 말은 모든 이산가족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는 자유롭게 남과 북을 오가는데 우리는 도대체 뭔가."

이동현 현대사전문기자

[이산가족 상봉 일지]

▶1971년 8월 20일=남북적십자간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 회의실에서 첫회담 개최

▶72년 6월 16일=남북적십자 제20차 예비회담, 남북적십자 본회담 의제 5개항 교환

▶72년 8월 29일=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

▶72년 9월 12일=남북적십자 제2차 본회담, 7.4공동성명 정신 구현 합의

▶85년 5월 27일=남북적십자 제8차 본회담,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합의

▶85년 9월 20일='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93년 3월 19일=이인모씨 북한 송환

▶94년 8월 9일=국회 외무통일위, 이산가족 재회 관련 대북결의문 채택

▶99년 6월 22일=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한 베이징(北京) 남북 차관급 회담

▶2000년 3월 10일=김대중 대통령, '베를린 선언' 발표

▶2000년 6월 14일=김대중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포함한 5개항 합의

▶2000년 6월 27일=남북적십자회담, 8월 15일 남북 각 1백명 이산가족 상봉 합의

▶2000년 7월 16일=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명단(각 2백명) 교환

▶2000년 8월 8일=이산가족 방문단 최종 명단(각 1백명)교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