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JP의 생존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3대 대통령 선거일인 1987년 12월 16일 아침. 투표를 하고 청구동 집에 돌아온 김종필(JP)신민주공화당 후보는 "나는 승리했다" 고 말했다.

그 대선은 '1노(노태우)3김(YS.DJ.JP)' 의 4파전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꼴찌를 한다.

그럼에도 그가 승리를 외친 이유를 주변에선 "7년 공백을 털고 '정치인 JP' 의 독자적인 지지표를 확인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80년 후배군인(신군부)들에 의해 제거됐던 비운(悲運)을 그는 이렇게 떨쳐내며 정치를 재개했다.

그 얼마 뒤. 그가 선거 며칠 전 출마를 포기하고 김영삼(YS)통일민주당 후보를 미는 후보단일화를 꾀하려 했다는 말이 나왔다.

투표날 밝힌 당당한 승리론과는 모순되는 얘기였다. 그러나 "약자의 생존전략" 이란 말이 그를 방어해줬다.

10년이 지난 97년 12월.

그는 다시 승리를 했다. DJP연합의 한축으로 김대중(DJ)대통령을 당선시켰다.

그 대가로 그는 총리로서, 공동여당 보스로서 2년간 절정을 누렸다. 주위에선 '오랜 기다림의 결실' 이라고 했다.

5.16 이후 38년 세월을 때론 권력자로, 때론 낭인으로 풍미해온 그다. 그런 질곡의 정치여정을 주위에선 이렇듯 '기다림의 장고(長考)정치' '몸 낮추기 생존술' 등으로 상징지웠다.

2000년 1월.

그는 DJ와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온갖 험담으로 공격했다. 4.13총선을 앞두고다. '내각제 갈등' 보다는 '선거전략 차원의 DJ 때리기' 로 정치권은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대패(大敗)했다. 15대 때 55석까지 늘어났던 자민련 의석은 17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기다리는 정치' 는 헝클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패전 후 그가 다시 DJ에게 돌아가는 장면을 여론은 이번엔 '카멜레온 정치' 라는 말로 두들겼다.그는 못들은 체 골프장을 돌아다녔다.

지난달 22일. 그날은 오늘의 국회파행을 부른 사건이 터진 날이다.

그 시작과 중심에 JP가 있었다. 왜소한 자민련을 국회 교섭단체로 만들고 말겠다는 집념. "정치판에 영원한 적(敵)은 없다" 는 말로 그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만나면서 일은 벌어졌다.

'대통령병' '나라 망친 후안무치(厚顔無恥)' 등으로 내내 李총재를 비난해온 그였다. 깜짝 놀란 민주당이 이틀 뒤 교섭단체 해결을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처리해줬고 여야관계는 얼어붙었다.

해프닝도 이어졌다. 한나라당 의원들의 국회의장.부의장 감금, 김종호 부의장의 탈출→검거→재감금, "JP의 일본 골프약속 때문에 국회일정 오락가락" 이란 비난, 민주당 세 초선의원의 항명성 방미(訪美)....

JP의 장단에 여야는 모두 춤을 추었고 상처를 입었다. 민주당은 16대 국회 첫 날치기 전과(前科)에 당 내홍(內訌)을, 이회창 총재는 '밀약설' 로 스타일을 구기고 "또 민생 발목 잡는다" 는 소리를 듣게 됐다. "더 심각한 건 갈 때까지 간 국민의 정치혐오" 라는 걱정도 퍼져 있다.

이런 과정이 2002년 대선, 그리고 그후까지를 계산한 JP의 또다른 전략일까. 사람들은 요즘의 그를 과거 '관록과 경륜의 JP' 이미지와 어떻게 비교하며 평가하고 있을까. '문(文).무(武).예(藝)를 겸비한 보수 로맨티스트' '소수(小數)로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 9단' 등의 점수가 앞으로도 나올 것인가.

JP는 여전히 말이 없다.

김석현 정치부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