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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다시 생각하는 세계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직업상 한 달에 한번 정도 해외 출장을 나가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세계를 직접 접할 기회가 많다.

일전에는 비행기 안에서 해외 유명지를 읽는 도중, 문득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인도네시아 출신의 화교로, 지금은 독일 국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체코에서 멕시코 기업을 위해 일하고 있다…. " 극단적이긴 하지만, 오늘날 세계화(Globalization)가 어디까지 진행돼 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세계화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정작 우리들은 아직도 뚜렷한 개념정립 없이 막연한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세계화에 대한 해석도 새로운 부의 창출기회 또는 신제국주의 등 필요와 입장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미국의 저명 언론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냉전체제의 상징이 장벽(wall)이라고 한다면 세계화 체제는 망(網. web)이라고 요약한다.

즉 냉전체제가 고착된 이념을 바탕으로 한 피아간의 '분단' 이 특징인데 반해, 세계화 시대의 기조는 통신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통합' 이라는 것이다.

이를 경제적 의미로 풀이하면 세계화 과정은 시장간의 입출을 가로막던 장벽들이 붕괴되면서, 세계가 상품과 서비스.자본 및 인력이 자유롭게 유통할 수 있는 하나의 동질적인 시장으로 변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동질적인 시장에는 과거와 같이 확연히 구분되는 적과 동지가 없다. 다만 경쟁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세계 어느 구석에서 경쟁자들이 튀어나올지도 불분명하다.

기존 진입장벽이 무너져, 언제라도 세계적 대기업들이 특정 시장에 뛰어들 여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세계화가 '소비자들에게는 천국, 기업엔 지옥' 이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또한 과거엔 한 나라의 경제적 성과는 국민이 투표 등을 통해 독점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 이외에 펀드매니저 등으로 구성된 국제 투자 커뮤니티가 평가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 투자가는 약간이라도 특정국 경제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앞다퉈 안전한 투자처로 피신해 나간다. 이들이 빠져나간 나라는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정권이 교체되는 것이 일반화했다.

국제 투자자본의 이기적 '군집 행동' 이 문제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투자여부가 거의 국민투표에 맞먹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 현실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외환위기를 비롯해 굵직한 경제적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났지만, 이 중에서 세계화 과정과 무관한 것은 거의 없다.

또한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나라는 세계화 과정에 더욱 깊이 편입돼 가고 있다.그렇다면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과연 우리가 '세계화의 덫' 에 빠져들고 있는 것일까?

세계화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와도 같은 현실이 됐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세계화는 덫도 아니고, 번영을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의 룰을 보유한 새로운 체제일 뿐이다. 여느 체제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유연하게 적응하는 자에게는 이익과 보상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손실과 시련을 준다.

우리나라는 과거부터 외세에 자주 시달리고, 상대적으로 나라 규모도 작다보니 외부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무조건 방어적으로 대응하기 십상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의 경우 아직도 세계화가 먼나라 소식이거나 또는 국내 시장을 잠식하는 불쾌한 조류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97년 말에 드러났듯이 우리는 이미 세계화 체제에 편입돼 있다. 우리가 먼저 세계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우리에게 밀어닥치게 돼 있다.

이들이 밀어닥칠 때는 이미 때가 늦게 된다. 우리 업체 역시 보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통해 글로벌 경영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라는 이야기다.

황두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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