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두루뭉수리 증후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영삼 대통령 :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보도가 우리 국민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외규장각 도서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본인의 가장 큰 바람 중의 하나로 이 문제의 해결은 상호간의 이해 심화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낭패 본 '외규장각 도서'

미테랑 대통령 : 한국이 외규장각 도서문제에 관해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과거의 어느 시대에 많은 나라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문서가 강제로 타국에 옮겨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도 이 고문서를 교류(change)의 방식으로 귀국에 영구 대여코자 하며 이에 관해 우리 대사관이 귀측과 협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우선 오늘 저녁 또는 내일 중 우호의 징표로 고문서 중 1~2권을 각하께 전달할 계획입니다.

이런 행동은 일찍이 해본 일이 없는 그야말로 한국에서 처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서를 거의 군사적 방법으로 가져갔지만 본인은 이를 다시 문화부장관으로부터 거의 무력적 방법으로 재차 탈취해 갖다 드리는 것입니다. (웃음)"

93년 9월 14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불 정상회담에서 오간 대화록의 일부다. 정부 공식 문건인 만큼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와 관련한 가장 확실한 두 정상간의 약속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록에서 우리는 지금껏 잘못 알고 있던 명백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껏 알고있던 영구임대 형식의 반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문건은 명백히도 '교류에 의한 영구대여' 라고 적고 있다. 여기 쓰여진 '교류' 란 '교환' 에 더 가까운 말이다.

이 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지 미테랑 대통령은 정상회담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도서 반환방식에 대해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프랑스법 전통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기간이 한정되지 않은 교환(change, exchange)과 대여(prt, loan)' 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이다" 라고 못박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 국민은 아직도 양국 정상의 약속에 따라 조건없는 영구임대로 외규장각 도서를 되돌려 받으리라 확신하는 것일까.

왜 처음엔 영구임대라고 했다가 나중엔 등가교환이 되고 지금엔 유일본과 필사본 교환이 거론되고 있는 것일까. 외규장각 도서 반환문제만 나오면 누구나 품고 있는 의문이다. 이 의문이 이 대화록을 보면 풀릴 수 있다.

나는 이 대화록을 뒤늦게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감정에 휩싸여 현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나 하는 한탄을 거듭한다.

물론 미테랑 자신도 고속철도 기종 선정과 관련해 교묘한 언술로 영구임대라는 냄새를 피운 흔적이 엿보인다. 실제로 도서 중 한 권을 우리측에 전달했고 도서관 여직원이 울면서 이를 막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러니 앞으로도 이런 식 도서반환이 되리라 미뤄 짐작했던 것이다. 정부 발표도 영구임대였고 언론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고 7년째 반환협상은 제자리 걸음을 걷다가 최근 들어서야 유일본과 필사본 교환임대가 구체화하고 있다.

약탈문화재 교환은 대체로 상호교환에 의한 무기한 기탁형식이 국제관례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가 그렇다.

인도 사르나트 박물관이 프랑스 기메 박물관에 소장 중인 인도 상아공예품의 반환을 요구했을 때 상호 영구대여 형식으로 전례를 만들면서 프랑스는 줄곧 이 방식을 취하게 된다. 대포와 군기를 맞교환한 독일 코블렌츠 시청과 프랑스 군사박물관 협정도 같은 경우다.

시모노세키전쟁 때 프랑스군이 노획한 일본대포를 프랑스측은 일본 갑옷을 받고 2년 단위 시한부 기탁 조건으로 되돌려주었다.

미테랑이 서울에 올 때는 이미 이런 숱한 선례 연구와 반환원칙을 마치고 왔을 터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로지 국민감정에 사로잡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테제베를 사줬으니 책 몇 권은 자동으로 딸려오겠지 하는 낙관론에 젖어 있었던 게 아닌가.

*** 챙길 건 챙길 줄 알아야

물론 국가나 개인이 선의에 따라 조건 없이 문화재를 되돌려주는 사례도 있다. 특히 고속철도 선정과 같은 국가간 빅딜이 있을 때는 외교적 물밑 노력으로 좋은 선례를 남길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의 기회를 놓친 채 지금 와서 남의 탓만 하고 있는 것이다. 남 탓만 할 게 아니다.

국민정서와 민족감정이라는 두루뭉수리 분위기에 휩싸여 넘어가는 정부나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고칠 일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챙길 것을 냉정하게 챙길 줄 아는 실사구시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 반미감정에 휩싸여 양키 고홈을 외치는 목소리, 통일 열기에 휩싸여 무조건 주고 따지지 말자는 맹목적 통일주의 기류, 이런 분위기가 국가안보와 민족의 장래를 해치는 '두루뭉수리 증후군' 임을 지금 외규장각 도서반환협상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권영빈 <논설주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