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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② 미군 - 중공군 첫 교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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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25전쟁 당시 미 8군 예비대의 6전차대대 C중대의 한 전차 위에 한국군과 미군이 함께 올라타고 작전에 나서고 있다. 이 6전차대대 C중대 소속 1개 소대 탱크 다섯 대가 1950년 10월 말 운산 지역을 정찰하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두 대가 핏빛으로 변해 돌아왔다. [백선엽 장군 제공]

중공군 포로를 잡아 일차 심문한 뒤 내 마음은 급해졌다. 포로가 자기 입으로 중국 남부 지역에서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나는 대규모 중공군 부대가 적유령 산맥 곳곳에 매복해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미군 측에 신속히 알리는 게 최우선 임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군 1사단은 미군 2군단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프랭크 밀번 미 2군단장은 평양을 거쳐 이미 신안주에 와 있었다. 밀번 군단장에게 우선 연락했다. 그는 곧 국군 1사단 본부에 도착했다. 그에게 포로를 보여 준 뒤 내가 통역을 하면서 그의 심문을 도왔다. 나는 심문이 끝난 뒤 “중공군의 개입이 분명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밀번 군단장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즉각 파악했다. 그는 이 사실을 도쿄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곧바로 보고했다.

운산 좌측 정면을 담당하던 김점곤 12연대장(예비역 소장)은 나에게 미군 전차 소대를 동원해 전방 정찰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차 정찰이 필요했던 이유는 연대 앞에 나타난 적들의 정체를 분명히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평양 공격 시 밀번 군단장에게 요청해 내 휘하로 지원받은 미 8군 예비대 6전차대대 C중대에서 M46 패튼 전차 다섯 대로 이뤄진 1개 소대를 12연대에 보내줬다. 6·25전쟁이 벌어지기 한 해 전에야 미군부대에 배치된 최신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차전 명장인 조지 패튼(1885~1945)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대 전면에서 전진하며 수색을 시작한 전차 소대는 곧 적과 충돌했다. 김점곤 대령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전방으로 수색을 나갔던 전차가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돌아왔다. 그러나 부대로 들어서는 전차 행렬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섯 대의 전차 가운데 두 대의 색깔이 완전히 변해 있었던 것이다. 석 대는 원래의 색깔대로 돌아왔지만 두 대는 완전히 빨간색으로 변해 있었다.”

두 대의 전차 색깔이 빨간색으로 범벅이 돼 돌아온 사유인즉 이렇다. 앞서 가던 전차 두 대가 어느 지점에 이르렀을 때 적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산악 지역에서 몰려나온 중공군 병사들이 맨 앞에 있던 두 대의 전차에 우르르 올라왔던 것이다. 이들은 수류탄 공격을 가하기 위해 해치(뚜껑)를 열려고 시도했다. 미군들은 당황했지만, 상당수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있던 노련한 병력이어서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이들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다른 전차 위에 올라선 적군들을 향해 곧바로 사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치를 닫고 탱크 안에서 서로 무선으로 상황을 주고받던 미군 전차 소대는 우선 맨 앞의 두 대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상대 탱크 위에 올라간 적군을 향해 기관총을 쏘았다. 선두 전차가 포탑을 왼쪽으로 틀면 바로 뒤의 전차가 기관총을 쏘아 그쪽에 붙어 있던 적군을 사살했고, 이어 선두 전차가 포탑을 오른쪽으로 틀면 그쪽에 올라가 있던 적군을 향해 사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뒤의 전차에 적군이 달라붙으면 앞의 전차가 포탑을 선회해 사격을 가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다. 두 전차는 결국 달라붙는 적군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전차가 돌아오자 부대가 술렁였다. 온통 핏빛으로 붉게 물든 전차 두 대를 보고 부대 전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점곤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전차가 돌아온 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핏빛으로 변한 전차에서 한 미군 전차병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큰 소리로 고함을 치르다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왁-왁-.”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를 치면서 마구 뛰었다. 그러자 전차 소대장이 나와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거리를 좁히고 벌이기를 반복했다. 뒤를 따르던 소대장이 급기야 몸을 던져 태클을 시도했다. 미식 축구의 태클 장면이 평안북도의 6·25 전장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설명이다.

그 전차병은 실성한 상태였다.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탱크 속에서 끊임없이 밀려온 공포감 때문에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소대장은 이를 직감하고 뒤를 쫓아가 부하를 붙잡았던 것이다. 피로 벌겋게 물든 탱크 두 대와 정신이 나가버린 미군 전차병. 운산 전투는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계속>


소련제 T34 초반 압도 … 미 M46 패튼 투입해 역전

전차는 6·25전쟁의 판세를 갈랐던 핵심 무기체계다. 북한군의 옛소련제 T-34-85 전차는 개전 초 국군을 유린했다. 국군은 당시 T-34를 막아낼 무기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전차들과 겨뤘던 T-34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였다. 북한은 6·25전쟁 개전 때인 50년 6월, 120대의 T-34-85 전차를 보유했 다. 북한군은 개전 초 T-34-85로 지상전을 주도했지만, 전세는 미군이 50년 8월 8일 M46 패튼 전차를 투입하면서 뒤바뀌었다. M46은 장갑 두께가 T-34의 두 배에 가까운 102㎜인 데다 주포의 구경도 T-34-85보다 큰 90㎜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는 1950년 말까지 200대가 배치됐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사진=육군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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