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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2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28. 심청가 스승 김창진

나에게 '심청가' 를 가르쳐 준 분은 김창진 선생이다. 김창룡(金昌龍.1872~35)명창의 막내 동생이다. 그래서 별명이 '끝동이' 였다.

김창룡 명창은 충남 강경 태생으로 아버지인 명창 김정근(金定根)에게 일곱 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고 이날치에게도 배웠다.

송만갑.이동백.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 멤버로 후진양성에 힘을 썼다. '심청가' 중 '꽃타령' , '적벽가' 중 '삼고초려' 대목이 그의 장기였다.

김창진 명창은 어릴 때부터 형을 따라다니며 북을 쳤는데 '육자배기' 도 곧잘 불렀다. 고수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한 그는 스무살 되던 해에 공주에서 형님이 보던 '심청가' 사설책을 훔쳐 달아나 돈 한푼 쌀 한톨도 없이 홍산 무량사로 들어갔다.

무량사는 스님이 1백50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 "1백50명이 밥 한 숟갈씩 덜 먹고 날 도와달라" 며 무조건 떼를 썼다.

당시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면 쌀 서말쯤 있어야 했다. 마당에 거적을 깔고 사흘을 굶고 앉아 있으니 절에서 스님들 짚신 삼아 주는 영감이 "내가 한달에 쌀 석되 보태겠다" 고 나섰다.

그는 '성공하지 않으면 죽으리라' 는 각오로 5개월 동안 소리 공부에 매진했다. 나중엔 어디서 소문을 듣고 한량들이 와서 쌈지돈을 집어 주었다. 독공 10년만에 형 김창룡 명창보다 소리가 더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특히 호흡이 길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서울에 가서 한량들이 벌인 소리판에서 노래를 하는데 용모도 잘 생겨 기생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그런데 통정대부를 제수받은 이동백(1867~1950)명창이 거느리던 기생과 교분이 났다. 둘이서 인력거를 함께 타고 가다 들통이 난 것이다. 서울에서 판소리 명창으로 성공하기란 이동백 명창의 영향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김창진은 결국 그 세력에 못 이겨 서울에 발을 못 붙이고 공주로 쫓겨 오다시피 내려왔다. 그러면서도 허리춤에 표주박은 늘 달고 다녔다. 길을 가다가 목이 컬컬하면 변소로 달려가 막걸리 대신에 똥물을 퍼 마시곤 했다.

나는 열 여섯 살때 장항에서 좀 떨어진 바닷가 비인에 거처하던 그분을 찾아가 '심청가' 를 배웠다. 그 양반 딸이 나의 5촌 당숙되는 분에게 시집 오면서 결혼식 참석차 공주에 왔을 때 선생을 다시 만났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단가 한 마디를 불렀는데 그때는 이미 폐인이 다 돼 있었다. 아편 중독 때문이었다.

김창룡 명창은 동생이 죽기 직전인 줄 알면서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보살피지 않으면 아편을 뗄 줄 알았는데 그만 몇달 뒤 동생 분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소리를 참 잘 했는데 빛을 못 보고 돌아갔으니 정말 아까운 분이다. 한번은 김창진 선생이 공주 환갑 잔치 때 초청을 받아 소리를 하는데 부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나와 듣는 바람에 손님 대접할 국수를 못 삶을 지경이었다.

원수도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던가. 이동백 명창과 김창진 선생이 전주에서 바로 옆방에서 잔 적이 있었다.

당시 대사습놀이에 참가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성여관에 묵었다. 대회날 아침이 되면 이방 저방에서 목을 푸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미닫이 문 사이로 옆방 소리가 다 들렸다.

김창진 명창이 '심청가' 중 '범피중류' 로 목을 풀기 시작하니 갑자기 주변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소리에 기가 죽었나 보다.

소리를 그치자 말자 옆방 미닫이 문이 활짝 열리더니 이동백 명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내 원수지만 잘 헌다. 너하고 나하고(맺힌 원한을)풀자" 하며 악수를 청하는게 아닌가. 이 정도면 그 소리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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