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 따르는 민주주의’ 완성이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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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일어나던 무렵, 우리는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미국 원조에 의존해야 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나라가 불과 50년 만에 세계 10위권에 다가가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민주주의 제도화에도 성공했다. 평화적 정권교체까지 이미 두 차례 이뤄냈다. 4·19가 뿌린 민주주의 씨앗은 우리 사회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탄생한 신생국 가운에 우리처럼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는 드물다.

그럼에도 4·19 50주년을 맞는 2010년 벽두, 뭔가 미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랑스러운 민주화 역사를 내세우기에 껄끄러운 장면이 국회에서, 거리에서 반복된다. 민주사회에서 갈등의 존재 자체를 뭐라 할 순 없다. 문제는 그 양상이다. 극단적이다. 대통령을 뽑는 ‘선거 민주주의’는 비교적 질서를 잡은 듯 보인다. 반면 의제를 설정하고 토론하며 실행해 나가는 ‘절차 민주주의’는 여전히 낙후하다. 과연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문제다. 엄밀히 말해 우리가 성공한 것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었다. 민주주의 꽃씨는 뿌렸지만 지속적으로 물도 주고 발전시키는 데는 서툴렀다. 민주주의 개념에 대한 오해도 한몫한다. ‘절차’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인식이다. 자신의 목적과 이념만 중요하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사생결단식 대결은 대개 여기서 비롯된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도 쓰는 이에 따라 기대치가 다르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고, 어떤 이는 과잉을 걱정한다. 더 많은 참여, 더 많은 평등을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법과 질서의 존중이 무너지는 현상을 개탄하는 이도 있다.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유세희 4월회 회장(한양대 명예교수, 4·19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은 참여와 평등의 정도에 대한 성찰이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했다. “국민적 참여의 폭의 확대가 민주주의 발전과 궤를 같이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더 민주적이라는 생각은 자칫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우를 범하면서 민주주의를 파탄으로 이끌 수 있다.”

평등의 문제도 그렇다. 참여와 평등의 적정선을 정하는 문제, 이것이 바로 4·19 50주년을 맞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와 선진국 진입을 희구하는 우리가 깊이 성찰해 봐야 할 문제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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