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빈민가 ‘방과후 선생님’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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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미국 워싱턴DC 남동쪽 아나코스티아 지역은 아직도 가끔 밤에 총소리가 들리는 빈민가다. 가구당 연간 소득이 8000달러(약 940만원)에 못 미친다. 주민 98%가 흑인이며 90% 이상은 편부모 가정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마약과 범죄에 빠져든다. 대학 진학률은 2%도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빈곤 아동을 대상으로 15년째 봉사 활동을 계속하는 엘리트 부부가 있다. 한국말로는 의사소통이 힘든 1.5세 재미동포다. 남편 스티븐 박(39·사진 오른쪽)은 보스턴대 영문학·방송학을 전공했고, 부인 메리(34·왼쪽)는 컬럼비아대에서 상담심리학 석사를 땄다. 스티븐은 7살, 메리는 6살 때 가족과 함께 각각 텍사스와 뉴욕으로 이민 왔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스티븐은 대학 재학 중 이 지역 인근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일을 돕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빈곤 어린이의 비참한 생활상을 지켜보며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 삶을 살았는지 돌아봤다. 사랑의 의미와 베푸는 삶을 되새겼다. 버려진 아이들은 먹지 못했고, 입을 옷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글을 못 읽었다. 그는 대학을 마친 뒤인 1995년 자선 방과후 교육기관인 ‘리틀 라이츠’(Little Lights)를 만들었다. 이곳은 지역 소외계층 어린이의 안식처가 됐다. 5~13세 어린이 100명 정도가 1대1 멘토링 등의 보살핌을 받는다. 수천 명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들 부부의 딸 케일라(6)와 아들 딜런(4)을 빼면 모두가 흑인 아이들이다.

스티븐은 “2년 전 봄 방학을 맞아 리틀 라이츠가 잠시 문을 닫았다. 그때 5살 된 남자 흑인 아이가 집 앞에서 호루라기가 목에 걸려 숨졌다. 이들 부부는 “아버지는 가출했고, 어머니는 마약 복용으로 잡혀가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곳엔 이런 슬픈 일이 많다”고 소개했다. 그 때문인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리틀 라이츠를 찾았을 땐 겨울 방학으로 문을 닫았음에도 흑인 남매 3명이 이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내 메리는 대학에서 카운셀러로 활동하다 스티븐을 만났다. 메리는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실제 상황에서 실천하는 한국계 미국인을 처음 봤다”며 “그때 들은 리틀 라이츠 얘기는 큰 충격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려다. 메리는 대학원을 마친 뒤 곧장 리틀 라이츠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두 사람은 3년 뒤인 2001년 결혼했다. 두 사람 모두 “봉사활동을 하는 데는 물론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한 데에도 부모의 반대는 없었다”며 “부모님이 적극적인 후원자”라고 했다.

메리는 “빈곤 아동에 대한 방과후 교육이란 결국 생활개선 문제로 연결된다”라며 “학생이 갑자기 부모를 잃게 되면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일에도 나서는 데, 그런 일이 잦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학생 가족끼리 집에서 싸우다 흉기를 사용하는 바람에 아파트가 피로 범벅이 됐다”며 “당시 청소를 도왔는데 그런 땐 정서적으로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는 “2009년 8월엔 리틀 라이츠를 돕는 26세 스태프가 길가에서 이유 없이 총을 세 방이나 맞았다”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지역사회 삶을 개선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느끼게 됐다”라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다른 안정된 직업을 찾을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돈이나 명예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팽개쳐진 아이들이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했을 땐 큰 보람을 느낀다. 밝은 미래를 품고 있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답했다. 리틀 라이츠엔 현재 전문직 종사자를 포함해 100명 정도의 자원봉사자가 있다. 지난해 4월 미 의회 공동체재단이 수여하는 켈러상을 받았다.

워싱턴=최상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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