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 BT 강국 보인다 <1> 성큼 다가온 바이오시밀러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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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IT) 벤처 거품이 꺼져가던 2000년대 초반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바이오기술(BT) 벤처 붐은, 출구를 찾지 못한 유휴자본을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2001년부터 불과 2년 동안 생겨난 바이오 업체가 600여 곳에 달했다. 외부 투자가 몰려 “바이오 벤처 업체에서 일하는 박사 한 명당 10억원 투자받지 못하면 바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그로부터 10년. 당시 업체 이름은 거의 사라지거나 회사 간판만 유지하는 수준이다. 몇몇 업체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업체들이 근래 해외로 진출하는 등 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의 차세대 수종산업이라는 BT, 이를 향해 뛰는 국내 업계의 현주소를 둘러봤다.

지난해 12월 7일 터키 이스탄불의 폴랏 르네상스 호텔. 인천 송도에서 온 셀트리온 직원 20여 명의 발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유방암 치료제 ‘허셉틴’의 세계 첫 바이오시밀러에 대한 유럽지역 임상시험을 앞두고 벌인 국제행사였다. 러시아·폴란드·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각지의 의사와 간호사 160여 명을 상대로 설명회를 했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이날 “동서양의 관문인 이곳(이스탄불)에서 바이오시밀러의 동서양 협력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글로벌 임상시험을 총괄하는 임영혁(혈액·종양내과) 삼성서울병원 교수는 “연내에 국내외에서 536명의 유방암 환자를 모아 임상시험을 끝내고, 연말이나 내년 초 임상 결과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동아제약은 지난해 11월 말 항암 보조 치료제인 G-CSF의 터키 진출 성공을 발판 삼아 유럽시장 수출을 적극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동아제약은 지난 3년간 러시아·터키·태국 등의 주요 제약사와 불임 치료제 ‘고나도핀’ 등 총 8000만 달러 상당의 단백질 의약품 계약을 하는 등 수출을 늘려왔다.

바이오시밀러를 비롯한 단백질 바이오 의약품이 한국 경제의 미래 먹을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단백질 의약품은 전 세계적으로 단일 히트제품 매출이 수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시장이다. 이런 제품의 특허 만료가 2012년부터 해마다 차근차근 도래함에 따라 국내 바이오 업계가 성장의 돌파구를 삼기 시작했다. 특히 화합물 신약 분야에서 선진국에 한참 뒤처진 국내 업계 입장에선 이를 만회할 만한 좋은 무대다. 연 4조원대 이상의 시장을 형성한 바이오시밀러는 허셉틴을 비롯해 엔브렐·레미케이드(이상 관절염 치료제), 리툭산(비호지킨림프종 치료제), 아바스틴(대장암 치료제) 등이 있다.

화합물 시장의 경우 특허 만료 이후 화합물을 복제한 제너릭 의약품의 허가기준이 간소화되면서 글로벌 제약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한 데 비해 바이오시밀러 시장은 이제 막 국가별 허가규정이 만들어지는 단계라 생산시설을 갖춘 선두업체가 유리하다. 세계적으로 유럽연합(EU)의 허가기관인 EMEA가 2005년 10월 바이오시밀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처음 만들고, 일본과 한국이 지난해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정도다. 미국의 경우 관련 법규가 의회에서 논의 중이다.

바이오시밀러는 개발비용이 보통 오리지널 신약의 10분의 1, 개발 기간은 절반 수준이다. 이에 비해 제품화 성공 확률은 신약에 비해 10배 이상 높아 글로벌 제약 업체들이 앞다퉈 뛰어든다. 세계적 복제약 업체인 이스라엘 테바가 가장 의욕적이다.

경기도 용인의 동아제약 연구소에서 한 연구원이 실험에 열중하고 있다. 업계 1위인 이 제약사는 2006년부터 바이오 의약품 시장에 관심을 갖고 수출을 해 왔다.[중앙포토]

국내 대기업들도 가만 있을 리 없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7월 반도체·휴대전화 이후의 새로운 먹을거리로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선정하고 9종 이상의 항체 바이오시밀러를 대량 생산한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2012년 항체 바이오시밀러 출시를 목표로 삼은 한화석유화학도 충북 오송생명과학단지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2018년까지 2055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항체 치료제 전문업체인 이수앱지스는 2007년 심혈관질환 바이오 의약품 ‘클로티냅’을 개발, 출시한 데 이어 현재까지 브라질 등 32개국과 3∼5년간 6759만 달러 규모의 수출 계약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아르헨티나 업체와 고셔병을 치료하는 바이오 의약품을 117억원 규모로 수출키로 했다. 항체 치료제 기술을 인정받아 삼성전자의 항체 바이오시밀러 개발에 협력하고 있다.

신생업체로 엔브렐 바이오시밀러를 개발 중인 바이오트라이온은 말레이시아 제약사와 함께 그 나라 현지에 바이오 의약품 생산설비를 건설하기로 했다. 말레이시아는 비교적 선진화된 의약품 허가·등록 절차를 갖고 있어 이곳에서 허가받은 바이오 의약품은 동남아는 물론 이슬람 국가로 수출이 용이하다.

단백질 의약품을 그대로 복제한 바이오시밀러에 비해 단백질의 약효를 개량한 바이오베터(Bio-better) 업체도 나온다. 한올제약의 경우 프랑스 노틸러스 바이오텍이 보유한 개량형 단백질 기술과 관련 특허권을 인수함으로써 바이오베터 업체로 떠올랐다. 노틸러스 바이오텍으로부터 확보한 ‘개량형 인터페론 알파’는 미국에서 임상시험 중으로, C형 간염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추광호 미래산업팀장은 “국내 바이오시밀러 산업의 성장을 위해 바이오시밀러의 약효 검증 등에 소요되는 엄격한 절차를 다소 완화하고, 제품별 특수성을 감안한 심사기준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스탄불(터키)·서울=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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