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 감상서 '신화, 그림으로 읽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제목만으로 책 내용을 전부 다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 제목 때문에 책을 오해하기도 한다.

굳이 양자택일하라면 이 책은 후자에 해당한다. 신화를 소재로 한 서양미술을 소개하고 있기에 '신화, 그림으로 읽기' 란 제목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통해 서양미술, 더 나아가 서양문명의 정신을 살펴본다는 취지를 이해하고나면 밋밋한 이 책 이름이 책 내용의 일부만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1995년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 (학고재)로 서양미술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했던 저자가 다시 한번 가족을 이끌고 발품을 판 결과로 만든 책이란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그렇다.

어쨌든 저자 본인의 표현대로 '낯선 동시에 익숙한 느낌' 의 이 책은 새천년의 흥분이 한창 고조되던 지난 연말연시 그리스에서 시작한다.

아내는 물론 세 아들까지 동반해 그리스.이탈리아.독일.프랑스.영국으로 이어진 45일간의 그리스.로마 유적 답사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행복한 가족여행이었지만 나름대로는 절박한 사정에 내몰린 미술 행군이었다. 그 사정이란 절망감이었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온다고 우쭐해하던 동양이 서양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과연 우리가 서양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뿌리찾기에 나서게 한 셈이다.

저자는 신화읽기를 통해 오늘날같은 서구의 우월은 '환영(幻影)의 전통' 에서 나왔다고 결론짓는다.

인간 유전자 지도까지 그릴 정도로 분명 과학은 발달했지만 정작 세계는 철저하게 환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

버추얼 리얼리티나 사이버 스페이스는 물론 첨단 특수효과의 진열장이 된 할리우드 영화 등 대중매체 역시 모두 환영의 공간 안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같은 환영의 역사 맨 꼭대기에는 제우스가 있다.

잘 알다시피 제우스는 뛰어난 변신 능력을 지닌 올림포스의 신. 엄처 헤라의 눈을 피해 바람을 피우려고 주로 변신술을 썼지만 어쨌든 인간에게 환영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줬다.

그리스 신화가 보여주는 이같은 변신의 힘은 서양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따지고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변신이나 미술이나 같다. 결국 화가들은 제우스의 충실한 제자들인 셈이다.

신화는 화가를 자극하고, 화가는 신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상호작용, 즉 환영의 전통은 서양이 동양보다 훨씬 앞서 있으니 환영의 제국인 이 지구상에서 서양이 우선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저자는 서양미술이 사실적인 미술 형태로 발전한 것도 이런 환영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모든 미술은 다 사실을 정확히 재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세계를 강조한 동양미술이나 영적세계에 집착한 이집트미술과 비교해볼 때 그리스의 사실적 미술은 더욱 두드러진다.

왜하필 그리스에서일까. 변덕스런 신들의 변신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사실적이면 사실적일수록 환영은 더욱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완벽한 모방이 흠많은 자연보다 진실을 더욱 참되게 드러낼 것이라는 생각은 그리스인들을 단순한 모방자에서 위대한 창조자로 자리매김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힘으로써의 모방, 그 힘이 사실적 미술을 낳았다고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신화,…' 는 이렇게 앞에서 신화를 담은 서양미술을 통해 서구의 정신을 캐낸다.

그 뒤에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가들이 사랑한, 아니 우리가 사랑한 그리스 신화 속 신과 영웅들이다.

방탕하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예술가들의 영원한 우상 아프로디테, 사랑이 있는 곳이면 늘 감초처럼 나오는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에로스, 쫓을수록 더 멀리 도망가는 님프들, 태양신 아폴론, 신이 내린 시련을 극복한 용기의 상징 헤라클레스 등이 그들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이나 베르니니의 '아폴론과 다프네'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들의 작품 뿐 아니라 책 한장을 넘길 때마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유명한 작품들은 신화를 좀더 신화적으로 바라보게 도와준다.

안혜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