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사라 '구두와 함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구두를 신으려고 하면 먼저 바닥이 보여요

바닥이 받쳐주는 구두의 아픈 몸

아무 말 없이

누구든 신고 떠나는 무저항주의자

검은 혀로 생을 맛보는

질긴 고통의 탐식가가

바닥을 한쪽씩 지워가는 동안

나는 쪽배에 얹혀 울면서

탐험을 계속하지요

바라볼 때보다

세상은 항상 길었어요

휘청휘청 세상 모서리에 찍히며

- 이사라(47) '구두와 함께' 중

구두는 무저항주의자라고? 하긴 구두의 집단이기주의, 구두의 항쟁을 우리는 본 일이 없지, 말없이 무거운 몸을 짐지고 아무리 먼 길도 마다않고 따라주는 구두의 고마움을 우리는 깨달은 적이 없지, 더구나 거친 땅바닥에 살을 찢기는 그 아픔까지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날마다 신고 벗는 구두의 바닥을 보며 그 검은 혀가 핥아가는 생을 맛보는 이사라의 감성이 치밀하게 구두의 삶이 아닌 우리의 삶을 꿰뚫고 있다.

이근배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