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다
누님이 편지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 김상옥(80) '봉선화'
이름만 들어도 금세 첫 수가 입에서 풀려나오는 현대시조의 대표적 작품이다. 1939년 '문장' 지로 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들이 '승무' 등을 들고나올 때 김상옥은 이 '봉선화' 로 시조가 한국시의 깊은 뿌리며 결코 자유시 못지 않게 큰 몫을 해낼 수 있음을 당당하게 선언한 작품이기도 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누님은 실로 매어 봉선화 물을 들여주었다. 첫눈이 올 때까지 꽃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난다던가, 이제 손톱은 비어있고 그날의 꽃물만 눈에 삼삼하구나.
이근배 <시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