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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딸 합류로 서울 한가위 행복이 두둥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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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 탈북자 홍병혁씨(右)가 추석연휴 가족잔치를 위해 음식을 준비 중인 딸 은경양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가운데는 부인 최춘화씨. 임현동 기자

24일 낮 서울 사당역 부근에 자리한 K교회 5층 옥탑방. 이 교회 관리집사인 홍병혁(61)씨의 단칸방 창문 너머로 부침개의 고소한 냄새와 바이올린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부인 최춘화(46)씨와 최씨 전 남편과 사이에 낳은 딸 은경(18)양이 추석 연휴를 맞아 한자리에 모일 가족.친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동안 홍씨는 바이올린을 잡은 것이다.

홍씨 부부는 2002년 4월 서울에 온 탈북자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지 2년반이 됐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이번이 첫번째 추석이나 마찬가지다. 뒤늦게 탈북 길에 나섰던 딸 은경씨가 네 번이나 중국 공안에게 잡혀 강제 북송되는 바람에 갖은 고초를 겪다 올 1월에야 서울 땅을 밟은 때문이다.

홍씨는"지난해 추석은 북한으로 잡혀간 은경이 생각 때문에 아내가 눈물로 며칠밤을 지샜다"고 털어놨다.

복음성가 몇 곡에 이어 '고향의 봄'을 연주한 홍씨가 갑자기 흥에 겨워 북한 가요 '휘파람'을 연주했다. 딸 은경양은 "북한 노래 들으며 전을 부치려니까 기분이 이상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 최씨는 "음식하는 솜씨를 보니 이제 우리 은경이 시집 가도 되겠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홍씨 부부는 중국에 숨어 살던 2002년 2월 첫 인연을 맺었다. 중국 현지에서 '탈북자의 대부'로 불리는 최봉일 목사의 소개로 두 사람은 만났다. 중국에서 7년간 숨어 살며 최 목사의 도움을 받은 홍씨는 집사 안수도 받았다. 탈북자를 도운 혐의로 2년5개월을 복역한 최 목사가 26일 중국에서 귀국했기 때문에 홍씨 부부의 올 추석은 더 뜻깊다.

홍씨 부부는 그해 4월 다른 탈북자 3명과 함께 목숨을 걸고 몽골로 넘어가 한국행을 신청했다. 그리고 한국에 온 직후 혼인신고를 했다. 그러고는 지난해 북에서 낳은 홍씨의 1남2녀를 차례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이들 자녀는 모두 장성해 가정을 꾸렸다.

그렇지만 최씨의 딸 은경양이 문제였다. 2001년 6월 첫 탈북 이후 강제송환과 재탈북이 되풀이됐다. 은경양은 "매번 혹독한 조사와 1~2주간의 강제노동이 주어졌고, 개처럼 취급받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엄마를 꼭 만나겠다는 생각에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행히 미성년자란 이유로 수용소로 보내지지는 않았고, 지난해 9월 한국 대사관의 문을 두드리는 데 성공했다.

홍씨 부부는 양천구의 임대아파트를 딸 은경양을 위해 내주었다. 은경씨는 요즘 컴퓨터와 영어를 배우느라 바쁘다.

얼마 전 휴대전화 회사에 다녔는데 영어를 제대로 몰라 이틀 만에 그만둬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엑셀과 파워포인트 등은 쉽게 다루게 됐다. 딸과 함께 음식을 만들던 부인 최씨는 북한의 추석 명절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북한이 남한보다는 더 추석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워낙 평소에 먹을 게 없다 보니 추석에 맞춰 특식으로 나오는 돼지고기 500g~1kg과 당과류(사탕)가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했다. 또 예술공연과 체육경기 등이 마을 단위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최씨는 "남한에서야 평소에도 잘 먹고 잘 사니 추석이라야 뭐 별다를 게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수준급의 바이올린 솜씨에 기자가 놀란 표정을 짓자 홍씨는 "원래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말했다. 18세 때인 1962년 북한에 들어간 그는 함흥예술단 단원으로 활약했다.

홍씨는 서울에 와서 100만원짜리 연습용 바이올린을 샀다. 그렇지만 수준급 연주가인 그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그가 북한에 두고온 자신의 손때 묻은 독일제 바이올린 생각이 간절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홍씨는 추석을 맞아 출가한 딸을 비롯한 가족을 초청할 계획이다. 처제 가족도 한국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적어도 15명은 모일 것이라며 뿌듯해 했다. 방이 좀 좁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말에 부인 최씨는 "이렇게 자유롭게 사는 데 그게 뭐 대수입니까"라고 웃었다.

홍씨 가족 외에도 지난 7월 말 베트남에서 집단 입국한 468명을 포함한 600명의 탈북자가 경기도 안성 하나원과 분당의 분원에서 한국에서의 첫 추석을 맞는다. 하나원 측은 안성시 연극협회의 공연과 송편빚기 행사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또 26일 양천구민회관에서는 탈북자 100여명이 참여하는 노래자랑이 펼쳐질 예정이다.

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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