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주(얼굴사진) 열사가 응징의 폭탄을 던진 일제 침략의 중심기관 동양척식회사. 1908년 세워져 1945년 패망까지 존속한 동척은 토지가 최대의 생산수단이었던 한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국책회사였다.
그의 외침은 외롭지 않았다. “지금 무엇인가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쳐주지 못한다. 이때에 왜정기관과 친일부호를 박멸하여 국내 동포의 잠자는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 1926년 5월 김구와 김창숙 두 민족운동 지도자도 폭력을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택했다. 김구는 자신이 세운 양산학교를 나온 제자 나석주(1890~1926)에게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제단에 한 몸 바칠 기회를 주었다. 그해 12월 28일 일제 침략의 중심기구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응징의 폭탄을 투척했던 그의 거사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이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그러나 황금정 2정목(지금의 을지로 1가)의 가두에서 권총으로 자결하며 남긴 그의 유언은 그때 거기를 살던 우리 선열들의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일제의 폭압에 맞서 민족의 생존을 지키려 한 저항 민족주의는 건강하고 정당했다. 그러나 준제국의 반열에 오른 오늘. “약자에게 발언의 장을 열어주지 않는 사회는 폭력적이며, 이는 표현의 권리를 얻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프란츠 파농의 일침처럼, 한 세기 전 의열투쟁은 당하는 자의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는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성찰의 거울로도 다가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