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윤이상과 송두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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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니 이게 정녕 통영 멸치란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은 이내 눈물로 얼룩졌다."네, 선생님. 통영에 사는 저의 누님이 직접 보내준 겁니다. 제 누이는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

1994년 독일 베를린의 고 윤이상씨의 자택에 독일 및 유럽주재 한국 특파원들이 몰려들었다. 윤이상 음악제 개최를 계기로 윤씨의 귀국을 한국정부가 허용키로 해 이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 특파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윤씨의 고향인 통영산 멸치를 한 부대 사 선물로 들고 왔다. 몽매에도 잊지 못할 고향, 통영의 멸치를 접하고 울먹이던 노음악가의 모습에 인터뷰하던 기자들도 모두 숙연해졌다.

"이번에 귀국하면 제일 먼저 고향에 달려가 마음껏 울어 보고 싶다" 고 말하던 윤씨는 이내 내일 소풍가는 어린이마냥 들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잠시 뒤 윤씨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국 정부 관리가 그의 입국조건으로 준법서약서, 다시 말해 그간의 행적에 대한 반성과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사실상의 항복문서를 요구한 전화였다.

이 전화 한통으로 그의 귀국은 영원히 무산됐다. 전화를 받으면서 낙담해하던 윤씨의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당시 고령인데다 67년 이른바 동백림사건 당시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윤씨는 이 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다음해인 95년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한 채 베를린에서 쓸쓸히 숨졌다.

윤씨가 살던 베를린 슈판다우구(區) 클라도라는 마을의 주민들이 마을창립 7백50주년 기념사업으로 펴낸 책자의 첫머리에서 "당신은 우리 마을에 세계적인 음악가가 함께 살고 있는 사실을 아십니까" 라고 극찬한 윤씨.

생일 때면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대통령으로부터 꽃바구니를 선물받았던 윤씨. 베를린예술원 종신회원으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최고의 음악가 윤이상씨를 우리는 이렇게 버렸고, 우리는 그만큼 더 가난해졌다.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34년 만에 귀국할 예정이던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뮌스터대 교수의 귀국이 좌절됐다는 소식이다. 어쩌면 그렇게 6년 전 윤씨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안타깝다.

한쪽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고 비전향 장기수까지 모두 송환하는 판에, 다른 한쪽에선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이 부조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남과 북을 모두 잘 알아 이미 시작된 남북 화해협력시대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유능한 학자 한명을 우리는 또 그렇게 잃고 있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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