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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7. 이몽룡이 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 "선생님, 얘가 뭘 압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소린데 화를 내시면 어떡합니까. 참으세요" 라고 했지만 이동백 선생은 "이 놈이 충청도놈이라 속을 모르겠다.

이 놈, 큰 일 낼 놈이다. 나는 극장 소리를 하고 즈그 선생은 진짜 소리를 한다니…. 에이, 괘씸한 녀석" 이라며 그냥 방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선생이 나간 후에야 다들 나를 나무라며 "너는 학교도 다닌 놈이 어째 그리 말을 못하냐. 너희 선생하고 이통정하고 갈등이 있어서 하는 소린데 왜 그걸 모르냐" 고 했다.

그제야 내가 함부로 입을 놀린 것이 후회가 됐다. 걱정이 돼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내가 이제 여기 못 있고 쫓겨 내려가겠구나. ' 쫓겨 내려가는 것은 괜찮은데 더 이상 소리 공부를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아무래도 매를 좀 맞고 일단 용서를 빌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매로 쓸 국화대를 뽑아가지고 무작정 이선생의 댁으로 찾아갔다. 선생은 아직 취침 중이고 사모님은 부엌일을 하고 계셨다.

양말을 벗고 바지도 걷어 붙이고 눈이 무릎만큼 쌓인 수돗가에 올라섰다. 눈이 차츰차츰 녹아서 발목까지 내려왔을 때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던 사모님이 나를 보고는, "아이고, 영감, 세상에. 이리 좀 나와 보소. 젊은 사람이 저렇게 벌을 서도 됩니까" 하고 소리쳤다.

그 말에 놀란 이 선생이 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내가 한 말이 그리도 고깝게 들리더냐. 고까웠어도 니가 참아야지. 어른이 한 말잉께. "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원체 배운 것이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말씀드렸는데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할아버지 분이 풀리실 때까지 때리십쇼. " 목침을 딱 갖다놓고 종아리를 걷고 그 위에 올라섰다.

선생은 나를 끌어내리며, "네가 진짜 모르고 한 소리라고 하니 내가 맞아야 한다. 늙은이가 주책없이 젊은 사람한테 이런 짓을 했으니 내가 맞아야지. " 그러면서 "이놈, 이놈" 하시며 당신 다리를 회초리로 두들기는 데 핏발이 좍좍 서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울며 매달리며 "할아버지, 제가 잘못 했어요" 하니 그제야 매질을 멈추며 "너는 제발 사람이 되라" 고 하셨다.

그 일 후 선생과 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다른 사람들한테 "얘가 그런 애다. 매를 맞겠다고 찾아왔으니…. 아주 애가 됐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런 가운데 정정렬 선생에게서 춘향가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정선생은 다른 사람이 소리를 하면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내가 소리를 하면 빙그레 웃었다. 점점 내 소리가 나아지고 있다는 속내를 표현하는 듯 했다.

어느날, 당시 최고의 극장이던 동양극장에서 창극 '춘향가' 를 공연하게 됐다. 스승들 한 팀, 학생들 한 팀이 꾸려져 각자 공연 연습을 하는데, 학생팀은 성미향씨가 춘향역을, 유성이라는 친구가 이도령을 맡고 김광렬씨가 방자를 맡았다.

연습 도중 별안간 이통정이 "내가 연출부장이니 내 맘대로 하겠다. 유성이 너는 소리는 괜찮은데 인물이 안된다. 광대는 풍채가 좋아야 한다. (나를 가리키며)니가 해라" 하는 게 아닌가. 유성에게는 방자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나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3개월 정도 연습을 하고 동양극장 무대에 섰는데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당시에는 오늘은 이도령이랑 만나는 데까지, 신관사또 부임하는 데까지 이런 식으로 연속극처럼 공연을 했는데 장장 여드레가 걸렸다.

관객들은 날 보고 "인물도 좋고, 소리도 조오타" 고 찬사를 보냈고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박동진 <판소리 명창>

정리〓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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