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인, 세계 축구 꼴찌팀 조련 나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정주완씨가 23일 감독을 맡고 있는 PNG 1부리그 CMSS 타이거 팀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CMSS 타이거는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CMSS 타이거 제공]

‘무적함대’ 스페인이 국제축구연맹(FIFA) 남자 국가대표팀 랭킹 1위(2009년 12월 현재)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꼴찌가 어느 나라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파푸아뉴기니(PNG)를 비롯, 산마리노·앵귈라·몬트세랫·미국령 사모아가 공동 203위로 최하위다.

그리고 PNG의 새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한국인이 최근 선임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PNG 축구협회는 최근 이사회를 열어 정주완(35) 씨를 신임 대표팀 감독으로 확정했다. 정 감독은 2011년 6월까지 세계 최하위팀의 지휘봉을 잡는다.

정 감독은 한국 청소년 대표와 올림픽 대표 출신이다. K리그 안양LG·전북현대에서 선수생활을 한 뒤 K3리그 ‘서울 유나이티드 FC’에서 선수 겸 코치로 뛰었다. 지인의 소개로 지난해 10월 PNG 1부리그 ‘CMSS 타이거’ 팀의 선수 겸 코치로 영입돼 처음 현지 땅을 밟았다.

정 감독은 “처음엔 답답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고 PNG 선수들을 평가했다. “신장과 스피드가 워낙 좋아 그렇지 기량은 한국 고교 1~2학년 수준”이라고 말했다. 공만 잡으면 패스할 생각은 않고 무조건 골대로 내달렸다.

정 감독은 3-5-2 포메이션을 선수들에게 가르쳤다. 축구 선진국에선 한물 간 전술이지만 탄탄한 조직력만 갖추면 위력적이란 계산에서였다. 한국에서처럼 강력한 규율도 도입했다.

훈련 시간을 철저히 지켰고 외출·음주 등 사생활을 통제했다. PNG 선수들은 ”호랑이 눈을 가진 감독님“이라며 그를 두려워했다.

처음 내리 세 번을 지던 팀은 그 뒤 승승장구했다. 성적이 오르자 선수들도 그를 따랐다. 중위권이던 팀은 2008~2009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그사이 그는 정식 감독에 선임됐다.

시즌을 마친 뒤 데이비드 청 PNG 축구협회장은 ”열악한 PNG 축구 환경에 변화를 주고싶다. 2002년 한국 축구의 열정을 기억하고 있다“며 정 감독에게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제안했다. PNG에서 축구는 럭비 시즌이 시작되면 경기장을 내줘 시합을 못할 정도로 비인기 종목이다. 축구대표팀 선수는 관행처럼 감독의 친인척·지인들로 채워졌다. ”거스 히딩크가 한국에서 그랬듯이, 축구문화만 바꾼다면 강팀으로 거듭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정 감독은 수락 이유를 밝혔다.

정 감독은 22일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뉴질랜드를 꼭 이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뉴질랜드는 FIFA 랭킹 82위로 내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출전국 가운데 최약체로 꼽힌다. 하지만 호주가 빠진 오세아니아권에선 단연 최강자다. PNG는 2002년 1-9로 패한 게 뉴질랜드와의 마지막 시합이었다.

정 감독이 뉴질랜드를 겨냥한 데는 PNG 선수들의 백인 공포증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그는 ”PNG 선수들은 백인 선수들을 보기만 해도 공황 상태에 빠져 공에 발을 제대로 갖다대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영국·호주 등의 식민지였던 PNG 사람들은 백인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 감독은 “한국 대표팀도 2002년 이전엔 유럽 팀만 만나면 주눅이 들었다”며 “선수들에게 자신감만 불어넣으면 지금의 한국팀처럼 우리도 백인들과 두려움 없이 경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밝혔다.

그의 목표는 2011년 오세아니안게임(아시아의 아시안게임에 해당)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다.

한국인이 외국 남자 성인 국가대표팀(A팀)을 맡은 건 2000년 고 강병찬 감독이 부탄에 부임한 게 처음이다.

그 뒤 유기흥(62) 감독이 부탄과 캄보디아팀을 이끌었다. 최근엔 김판곤(40) 감독이 홍콩팀을 이끌고 동아시아대회에서 우승해 돌풍을 일으켰다. 

이충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