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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만 공룡 수도권] 망가지는 종로 북촌마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과 경계한 종로구 가회동 1번지 주택 공사 현장.

45도 가량 경사진 이곳은 올초 소규모 한옥 88채를 허물고 고급 빌라 5개동(40∼50가구)을 짓기 위해 도로개설 작업이 한창이다. 모 업체가 한옥 거주자들로부터 3천여평의 땅을 모두 사들여 4층짜리 빌라를 지으려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 뒤 안국동 8의1번지도 최근 한옥훼손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논란은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된 고 윤보선(尹潽善)전 대통령의 한옥 담장 옆에 있던 단층 한옥을 헐고 4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을 지으면서 비롯됐다.

한옥아낌이모임 등 시민단체들이 “한옥 바로 옆에 콘크리트 건물이 흉물처럼 생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며 반발했지만 “현행 법에 하자가 없다”는 구청의 주장에 밀려 공사는 진행중이다.

서울시도 “한옥보존의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북촌(北村)마을’이 망가지고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좌우에 낀채 북악산 밑에 위치한 전통 한옥마을이 일관성 없는 보존정책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원형(原形)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종로의 북쪽에 있다해서 붙여진 북촌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옹기종기 들어선 한옥들이 고풍스런 분위기를 간직해왔다.

그러나 가회,원서,삼청,안국,재·계동 등 11개 동이 모여있는 이곳은 이제 더이상 ‘한옥마을의 원조’도 아니고 ‘서울의 얼굴’로 내놓을 수도 없게 됐다.

한옥을 야금야금 허문 자리에 고급빌라가 들어서고 기존의 저층 주택가에는 도로·주차장 등 기반시설의 확충없이 다세대주택만 난립하고 있다.

◇실패한 한옥보존 정책=주민들은 서울시의 현실성 없는 밀어붙이기식 한옥 보존행정이 한옥을 보존하기는 커녕 북촌마을을 오히려 망가뜨려왔다고 주장한다.

가회동 주민 윤종복(尹鍾福·50)씨는 “1983년 보존이란 명분에만 급급한 나머지 서울시가 면밀한 현장조사도 없이 북촌마을 전체를 획일적으로 ‘집단 4종미관지구’로 묶으면서 문제가 초래됐다”고 지적했다.

보존가치를 따지지 않고 19만5천평에 달하는 북촌마을 전역을 보존지구로 지정한 후 서울시는 도로·주차장 등 주민을 위한 기반시설 투자를 등한시했다.

84년부터 이 지역에 한옥보존을 이유로 까다로운 건축기준이 적용되면서 땅값이 폭락하자 오랫동안 살아온 중산층이 북촌마을을 대거 이탈했다. 그 자리에 저소득층이 들어왔다.

한옥은 건평 30평 기준으로 5∼6년마다 최소 3천만∼4천만원에 달하는 수리비가 들어간다. 그러나 저소득층은 수리비 부담능력이 없어 한옥은 점점 낡아졌고 주거공간도 열악해졌다.

주민들의 끊임없는 반발로 91년과 94년 두차례 건축기준이 대폭 완화됐다. 이때부터 누구나 4층(20m이상,도로변은 5층)이하 또는 16m이하의 집을 지을 수 있게됐다. 올해 5월부터는 구청의 까다로운 건축심의도 없어졌다.

그러나 일률적인 건축규제 완화 이후 또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그나마 한옥이 잘 보존돼온 가회동 31번지를 비롯해 곳곳에 한옥을 헐고 2∼5층 짜리 다세대주택을 짓는 현상이 속속 벌어진 것이다.

실제로 85년이후 종로구가 허가한 3층이상 건축물 2백73건중 2백65건이 92년 이후에 허가됐다.

또 최근 종로구 조사에 따르면 북촌마을의 가옥 2천2백97동중 한옥은 46%인 1천56개동 뿐으로 집계됐다.

◇다세대주택 밀집한 원서동=망가진 북촌마을의 또다른 현장으로 창덕궁과 비원의 서쪽에 위치한 원서동(苑西洞)일대가 꼽힌다. 현대그룹 본사가 위치한 계동과 재동초등학교 주변을 포함하는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원서동은 원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소유의 국유지였다. 한국전쟁때 난민들이 무단 점유하면서 들어선 불량 주택과 소규모 한옥을 헐고 91년부터 18평미만의 다세대주택이 무더기로 들어섰다.

특히 이곳은 건폐율·동간거리·도로 확보·주차장 신축 등 건축기준이 일반 건축물에 비해 파격적으로 완화된 규정을 적용받는 ‘주거환경 개선사업지구’로 지정됐다.결과적으로 도로와 녹지를 제대로 확보하지 않은채 좁은 땅에 지나치게 조밀하게 지어졌다.

주민 최여랑(崔麗郞·52)씨는 “그나마 종로구가 녹지공간으로 매입한 땅을 업자에게 되팔아 다세대주택이 건설되는 바람에 주거여건이 더 나빠졌다”고 주장했다.

고려대 건축학과 이정덕(李廷德)교수는 “북촌은 서울의 옛모습을 지켜온 마지막 공간”이라며 “보존가치가 있는 한옥은 매입하거나 수리비용을 융자하는 등의 적극적인 시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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