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내 마음의 분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삼촌과 고모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부터 아버지는 원적지를 외우게 하려고 애를 썼다.

발음이 서툴러 자꾸만 '봉동' 을 '똥통' 으로 말하던 언니는 몇번씩 아버지로부터 치도곤을 맞았다.

'경기도 개풍군 봉동면 봉동리 983번지' 는 그렇게 해서 나의 뇌리에 잊을 수 없는 주소로 입력됐다. 호적에서 원적표시가 사라진 후에도, 결혼으로 호적이 바뀌어도 그것은 여전했다.

고향땅을 외우게 한 정성의 10분의 1만으로도 5남매라는 형제들의 이름을 다 외우게 하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아버지는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삼촌이 아니었다면 나는 살아서 이남에 오지 못했을 거다."

한두마디의 편린을 긁어모아 나는 아버지가 일제시대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헌병이 됐다는 것, 그것이 결국 족쇄가 돼 당시 해주의 지주였던 부모곁을 떠나야만 했다는 것, 두엄을 실은 소달구지에 숨어 겨우 38선을 넘어왔다는 것, 검문을 교묘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당 간부였던 막내 삼촌 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선을 넘나든 사람이 아니면 죽음의 공포를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버지는 북의 가족에게 남의 가족이, 남의 가족에게 북의 가족이 행여 화근이 될까봐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이남에 온 아버지가 훗날 6.25전쟁을 겪으며 이런 이유들로 다시 한번 생사를 넘나드는 모진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을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전해 듣고 고향땅은 전하면서도 형제는 이름모를 친척으로만 남겨두고자 했던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비단 우리 가족 뿐일까. 이런 저런 개인사를 지닌 채 해방전후나 1.4후퇴 당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이산가족은 수십만명을 헤아린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은 쉼없이 흘러 38선으로 시작된 분단의 역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던 6.25도 올해로 반백년 전의 일이 됐다. 그 긴 세월을 딛고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이제 6월은 '비극의 달' 에서 '희망의 달' 로 변했다.

'분단에서 통합으로' 는 이 시대의 화두다. 북측이 만든 '반갑습네다' 가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가 하면, 김정일에 대한 이미지마저 크게 바뀌고 있다.

여기저기서 북한 바로알기 열풍이 불고 있다. 반가운 징조다. 그럼에도 한가닥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네 마음속에 자리잡은 분단의 벽은 그대로 남겨둔 채 덧칠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과연 우리는 '마음의 분단' 을 극복했을까. 모든 색의 토대가 되는 삼원색 가운데서도 빨강은 가장 화려한 색이다.

그렇지만 빨간 현수막이나 머리띠를 보면 저도 모르는 새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통합으로 나아가려면 알게 모르게 각자의 마음에 자리잡은 분단부터 없애야 한다.

나는 '잃어버린 단어 되찾기' 가 이 벽을 허무는 첫 삽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동무 따라 강남간다' 는 속담은 어느 결에 '친구따라 강남간다' 로 변했다.

1960년대만 해도 동요 속에 남아 있던 동무란 단어는 이젠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요즘 아이들은 아무도 벗을 동무라고 부르지 않는다. 순 우리말인 동무가 사라진 빈 자리에 한자어인 친구가 들어앉았다.

뿐만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의 규정이다.

그러나 공화국의 구성원인 자연인을 뜻하는 인민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단어로 전락한지 오래다.

북의 '주체 사상' 이 등장하면서 주체라는 말도 같은 신세가 됐다. 우리 사회에서 인민은 국민으로, 주체는 자주로 자리바꿈했다.

분단의 세월이 4천만에게 드리운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어느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되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낱말들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자. 본래의 느낌을 잃어버린 색상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돌려주자. 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민족의 통합은 외부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분단' 을 털어내는 것은 우리 몫이다.

홍은희 <문화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