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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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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공자의 뛰어난 제자 열 사람(孔門十哲) 가운데 자유(子游)란 이가 벼슬길에 나아가게 됐다. 공자가 그를 찾아가 물었다. “자네는 사람을 구했는가” “담대멸명이란 자가 있사온데, 그는 지름길을 마다하며(行不由徑),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방에 찾아온 일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자는 흡족해했다.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고사다. 선현들은 가까운 지름길을 놔두고 먼 길을 돌아갈지언정 바른 길(正道)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게 군자의 첫째가는 덕목이라 가르쳤다.

공맹의 도리를 달달 외던 선비들이 한 번 벼슬길에 들고 나면 책 속의 바른 길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중종 때 대사간 유세침이 군왕이 새겨야 할 덕목 7가지를 적은 상소문을 올렸다. 그중 다섯 번째 조목. “분경(奔競=엽관운동)을 억제해야 합니다. 선비 된 자가 친분에 의탁하여 아첨으로 구하고 오직 방계곡경(旁谿曲逕)을 다투어 모방하고 있으니 사습(士習)의 훼손이 이보다 심할 수 있습니까.” 방계곡경이란 숨은 계곡이나 샛길, 굽은 길을 말하는 것으로 이 역시 정도가 아닌 길로 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반계(盤溪)곡경, 방기(旁岐)곡경 모두 같은 말이다. 중종 초기라면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 공신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니 그에 빌붙고자 하는 이들의 엽관행각이 오죽했겠는가. 현실 정치에 깊이 발을 담갔던 율곡 이이 역시 소인배와 군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소인배는 제왕의 귀를 막아 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경계했다.

교수·지식인 216명이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방기곡경을 선정했다. 한 해 동안 정도가 아닌 편법과 사술이 횡행했음을 꾸짖는 얘기다. 아닌 게 아니라 올해 정치판에서 이 성어가 등장한 적이 있다. 지난 6월 여당 대변인은 국회 문방위 회의장을 봉쇄한 야당 의원들을 향해 “이를 두고 방기곡경이라 한다. 길 위에서 길을 잃은 민주당의 난처함이 오죽하겠는가”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올해의 한자성어를 고른 교수들의 질타는 여야를 가리지 않았으니 여당 대변인이 모처럼 문자를 쓴 것도 모양이 우습게 됐다. 직장인들이 뽑은 올해의 성어는 ‘구복지루(口腹之累)’였다. 먹고살 걱정이란 뜻이다. 방기곡경에 빠진 위정자들이 서민들의 구복지루를 헤아릴 겨를이라도 있었겠는가.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