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과격 노조 대명사’ 벗어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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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현대차 노사는 ‘노조 창립 이래 22년 만의 첫 임금(기본급) 동결’이라는 명분(회사)과 보너스 인상, 고용보장이라는 실리(노조)를 서로 나눴다. 현대차노조(지부장 이경훈)는 1987년 창립 이래 처음으로 기본급을 한 푼도 올리지 않기로 한 회사 측 임금협상안을 수용했다. 대신 예년보다 훨씬 더 많은 보너스와 고용보장을 받아냈다. ‘명분보다 실리’를 기치로 15년 만에 처음 집권한 현 집행부의 노선에 충실한 교섭 결과다.

현대차 노사는 21일 울산공장 아반떼룸에서 열린 21차 임단협에서 ▶임금(기본급) 동결 ▶통상임금 대비 300%의 성과급(1인 평균 600여만원), 일시금 500만원, 주식 40주(450만원) 등 총 1550만원 상당의 보너스 지급에 잠정 합의했다. 또 별도협약을 통해 “노조는 회사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회사는 고용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확약서도 채택했다. ▶3자녀의 학자금 전액지원(지금까지는 2자녀까지는 전액, 셋째는 50%) ▶자녀 출생 시 3일간 휴가에도 합의했다.

잠정합의안은 23일 전체 노조원 찬반투표로 타결 여부가 확정된다. 현대차 강호돈 부사장은 “막연한 기대 수준을 놓고 노사가 다투기보다 미래와 현실을 고려한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았다”며 “조합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현대차 노사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파업 없는 한 해를 넘길 가능성이 높아졌다. 현대차노조는 87년 창립 이래 94년 단 한 해를 제외하고 매년 파업을 벌여 회사에 총 11조6682억원의 자동차 생산 손실을 입혔다.

지금까지 파업이 없었던 해는 현재 집행부처럼 실리파로 분류되는 이영복 노조위원장 집행부 시절(2년간)의 첫해였던 94년뿐이었다. 이번 합의로 현대차노조도 합리적인 집행부가 들어서면 ‘과격노조의 대명사’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유례없는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임금동결이라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안해 현대차 노사가 사상 처음으로 임금동결에 전격적으로 합의한 것도 이례적이다. 특혜 시비에도 불구하고 세금 감면이라는 혜택을 제공한 정부와 국민의 시선을 노사 모두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차노조 측은 “실리를 외면하고 장기적인 회사 부담을 가져올 임금인상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고용불안이라는 부메랑으로 자신들에게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안팎의 우려를 외면할 수 없었다. 장기적인 회사 안정이 조합원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고 배경설명을 했다.

실리파 집행부는 이번 협상과정을 통해 현대차 노사협상문화의 새 기틀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노조는 관성적으로 ‘결렬선언→쟁의 결의→파업찬반투표→파업’의 일정을 밟으며 회사를 압박했고, 회사는 파업이 벌어질 때까지 본격적인 협상카드도 내놓지 않는 소모전을 답습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회사 측이 협상을 재개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11일 일괄협상안을 내놨고, 노조는 막판까지 결렬선언을 유보하는 인내를 보여줌으로써 노사 상생의 결과를 얻게 됐다.  

울산=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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