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김정일 쇼크'와 이회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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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 김정일(金正日.JI)국방위원장이 남쪽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함께 6.15선언을 내놓은 뒤 "옛날 정치인 같으면 이런 일을 못했을 것" 이라고 자평했다.

남쪽의 구(舊)정치인을 핀잔주듯 하는 여유와 당당함 속에 등장한 것이다.

여야의 정국 운영에 있어 그의 존재는 주요 변수가 돼버렸다.

金위원장은 "金대통령과 내가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남쪽 정치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실감나는 'JI변수' 는 이미지 충격이다.

그의 재담꾼적 면모, 활달함은 사소한 사안을 놓고도 부닥치는 여야 정쟁(政爭)에 피곤해한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다' 며 연장자인 金대통령을 치켜세우는 장면은 남쪽에서 사라져가는 윗사람 공경문화를 기억케 했다.

1994년 김일성(金日成)주석 사망 이후 전통적인 3년 상(喪)을 4년으로 늘려 치르는 효심(孝心)의 유훈 통치술로 권력장악에 성공한 金위원장이다.

그런 '효자 정치' '통큰 정치' 의 면모는 남쪽 정치 행태와 비교 대상이 돼버렸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 민주당 이인제(李仁濟)상임고문.노무현(盧武鉉)지도위원 등 DJ 이후를 노리는 대권주자들에게 JI 이미지 변수는 위협적이다.

국민들은 차기 주자의 적격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3金정치와의 차별성을 따진 뒤 金위원장의 행태와 비교하는 습관이 생기게 됐다.

남쪽 정치권에 시위하듯 나온 金위원장의 이미지 선점(先占)효과다.

金위원장의 이미지 관리는 치밀한 연출의 요소가 다분하지만 국민들은 그런 것보다 "누가 金위원장을 압도할 수 있느냐" 는 부분을 따질 것이다.

이런 상황 전개는 이회창 총재에게 부담이다.

그동안 李총재는 '포용력이 떨어진다' '타협자세가 부족하다' 는 얘기를 듣고도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없다.

李총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원칙과 논리를 3金정치에 대한 비교우위로 내세워 이런 비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해왔다.

그러나 유머.재담으로 포장한 JI 이미지는 그런 논쟁을 부채질할 수 있다.

정치에 있어 유머는 거친 논쟁을 일정수준 잠재울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다.

유머의 위력이 압도적인 미국쪽에 金위원장이 거침없이 등장할 수 있는 전망을 낳는 요소다.

이는 李총재에게 이미지 관리의 딜레마로 작용할 것이다.

총선 이후 李총재가 다듬어온 '아름다운 원칙' 은 여러 대목에서 한계를 노출했다.

李총재는 남북 상호주의와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보를 金대통령에게 강조했다.

정상회담의 초당적 지원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李총재의 지적은 적절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정치적 배포를 보여주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방북 대표단에 끼지 않았다.

박근혜(朴槿惠)부총재를 대표단에 넣지 않은 이유로 李총재가 내세운 것은, 정상회담이 정당사회단체 회담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역사성과 파격성은 그런 걱정을 훨씬 뛰어넘었다.

김일성과 체제.경제경쟁을 했던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의 딸이 평양에 등장했다면 극적 요소를 추가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한나라당 내부에서 나온다.

李총재는 "정상회담의 미진한 부분을 짚겠다" 고 다짐하고 있다.

그 대상은 자주적 통일방안, 미전향 장기수, 국군포로 송환, 주한미군문제 등이다.

그러나 정국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보수 원류인 자민련과의 협조도 곤란하다.

이미 자민련은 DJP공조로 민주당쪽에 서 있다.

李총재는 이를 김종필(金鍾泌.JP)명예총재의 말 바꿈 정치라고 비판했으며, 여론도 밀어주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헌정 사상 처음인 여소야대 양당구도의 행운을 관리하는 데 미숙한 측면도 드러났다.

3당총무 모임 때 한나라당은 자민련과 사진찍기를 거부, 망신을 주었다.

'자민련은 끝났다' 고 경멸하는 듯한 태도는 JP로선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셈이었다.

6.15선언으로 우리 정치의 한쪽에 통일 정국이 시작되고 있다.

그런 속에서 차기 지도자들의 우선적 이미지와 전략은 국민 대통합이다.

李총재에게 떨어진 핵심 과제다.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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