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쇼크 그 이후] 1. 이데올로기 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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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남북 정상회담 이후 각계각층에서 엄청난 의식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북한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선입관이 여지없이 깨져나가면서 통일에 대한 희망의 목소리와 함께 혼란을 우려하는 지적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현재 진행중인 사회변화의 흐름을 점검하고 신(新) 남북시대에 걸맞은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정말 의외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태도. (그의 모습은) 차라리 귀엽기까지 했다."

지난 13~15일 남북 정상회담 기간에 개설된 국내 한 인터넷사이트의 '김정일 팬클럽' 에 올라온 글들이다.

클럽을 만든 실향민 2세 김준겸(29.회사원)씨는 "북한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다 김정일 위원장의 캐릭터가 연예인처럼 멋져 팬클럽을 조직하게 됐다" 고 말했다.

남북 정상의 만남 이후 분단 55년간 사회 전반에 스며있던 반공 이데올로기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많은 시민들은 "이런 충격이 냉전시대의 의식을 극복하고 통일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 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가치관의 혼란이 장기화하거나 세대.계층.정파간의 대립 양상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일부에 퍼져 있다.

회사원 김명수(金明秀.30)씨는 며칠 전 회식 자리에서 동료들과 한바탕 논쟁을 벌였다.

동료 대다수가 "김정일 위원장의 행동을 보니 정말 통일이 될 것 같더라" 고 반응했기 때문이다.

특전사에서 군 복무를 했던 金씨는 "부자세습을 한 북한 지도자를 너무 좋게 평가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몰았다" 고 소개했다.

사랑의전화복지재단(회장 沈哲湖)이 지난 15일 전국 6백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8.2%가 '김정일의 외모가 서민적이면서도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고 느꼈다'고 응답했다.

정상회담 기간 중 전국의 일부 대학가에는 인공기가 내걸리면서 북한 알기 열풍이 불었다.

갑작스런 의식의 변화는 교육 현장에서도 감지됐다.

16일 오후 서울 수서초등학교 6학년 3반 교실. 본사 취재팀의 조사 결과 총 37명의 학생 중 30명이 "김정일 위원장을 좋게 생각하게 됐다" 고 반응했다.

한 남학생은 "전쟁을 좋아하고 강제로 일만 시키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유머감각도 있고 화끈한 사람 같다" 고까지 말했다.

한편으로 대다수 교육현장에선 기존의 반공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에 있는 '이승복 기념관' 에는 정상회담 기간 중 하루 평균 1천명의 어린 학생들이 다녀갔다.

한국자유총연맹이 주최하는 6.25 관련 웅변대회가 오는 23일 전국 15개 시.도에서 열릴 예정이다.

서울 독립문초등학교 강성오(姜聲吾)교감은 "교사와 학부모의 혼란도 심각한 만큼 하루빨리 정부가 교육 기준을 정한 뒤 교사 재교육에 나서야 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상진(韓相震)원장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훈련이 전무한 상태에서 국민들이 새로운 학습과정에 들어간 셈이므로 충격은 불가피하다" 며 "이 과정에서 사회전반의 해석 능력이 증진된다면 오히려 남북 화해에 도움이 될 것" 이라고 진단했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손호철(孫浩哲)교수는 "북한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 개인 스스로가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각 분야에서 세심하고 다양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박신홍.김성탁.하재식.박현영.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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