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 파워

윤봉길과 배용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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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여기에 각오는 별 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관(棺)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無所用)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 이 각오로 상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 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윤 의사가 거사를 치르고 현장에서 체포되기 이틀 전 써 놓은 자서 약력의 한 부분이다. 참으로 강고한 조선 청년의 기개가 그대로 담겼다.

#여기 윤 의사가 ‘강보(襁褓)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모순(模淳), 담(淡)’이라 제목 붙인 두 아들에게 준 친필 유언시도 있다. “너희도 피가 잇고 뼈가 잇다면 반다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극에 깃발을 놉히 드날리고/나의 빈 무덤 압헤 차자와 한 잔 술을 부어 노으라/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업슴을 슬퍼하지 말어라/사랑하는 어머니가 잇스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도록/동서양 역사상 보건대/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푸레옹이 잇고/미국에 발명가 에디손이 잇다/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 의사의 아내이자 그 아이들의 어머니인 배용순. 열여섯에 한 살 아래였던 윤우의(윤봉길의 본명)와 혼인해 스물여섯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과 함께 산 햇수는 칠 년. 남편이 상하이로 떠난 해에 둘째 아들 담을 배고 있었다. 남편은 거사 후 한 달이 채 안 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후 7개월 만에 처형됐다. 남편이 상하이로 가던 해에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던 담이마저 아홉 살 되던 해에 복막염으로 죽었다. 무심한 세월 속에 남편이 집 나간 지 십오 년 만에 광복이 됐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꿈에도 그리던 남편의 유골뿐! 국민장으로 치러진 남편의 장례식은 장엄했지만, 그때까지도 남편의 죽음을 마음속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그 장례식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남편을 떠나 보내야 했다.

#장제스(將介石) 총통이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조선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경탄해마지 않았던 윤 의사였다. 하지만 그 역시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윤 의사는 사사로운 그 모든 것을 넘어 거사를 벌였다. 그러나 저마다 인생거사의 뒤편엔 반드시 소리 없는 눈물이 있는 법! 그것이 때로 세상을 뒤흔드는 거사보다도 크고 위대할 수 있음을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되새겨 보자. 대통령의 치적 뒤엔 묵묵히 일해온 국민이, 시장의 업적 뒤엔 참고 견뎌준 시민이, 기업의 성공 뒤엔 땀 흘린 근로자가, 가장의 성취 뒤엔 희생을 애써 내세우지 않은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올해가 열흘 남짓 남았다. 나의 성공, 성취, 이룸 뒤에서 눈물 뿌린 이들의 존재를 되새길 시간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