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길 다른삶] 8. 신중현과 한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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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국 록과 포크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62)과 한대수(52). 한국 대중음악사를 정리하면서 빠지지 않는 이름들이다.

두 사람은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 각기 록과 포크를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비슷한 시기에 시대를 앞선 음악을 들려줬다는 공통점 외에 두 사람은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

나이차는 10살이나 벌어지는가 하면, '언더그라운드의 기수' 였던 한대수는 대중적인 지명도에서 신중현을 따라잡지 못한다.

신중현이 국내에서 작곡가로 프로듀서로 활약할 때 한대수는 가요계에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또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두사람이 74년 나란히 발표한 '신중현과 엽전들 1집' 과 한대수의 데뷔 앨범 '멀고 먼 길' 은 가요계의 명반으로 나란히 꼽힌다.

'커피 한잔' '미인' '빗속의 여인' 등을 히트시켰던 신중현은 명실상부한 '한국 록의 아버지' 다.

62년 한국 최초의 록밴드 '애드 포' 를 결성한 그는 70년까지 '블루즈 테트' '엽전들' 등의 그룹을 이끌며 국내 록음악의 토대를 다졌다.

74년에 발표한 '신중현과 엽전들' 은 종종 한국 음악이 서구 음악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모범 답안' 으로 거론된다.

한대수의 데뷔앨범 '멀고 먼 길' 역시 74년에 출반됐다.

그는 당시나 지금이나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보다는 소수 매니어 음악팬들에 의해 추앙받는다.

"노란 레인 코트에 검은 눈동자 잊지 못하네" (빗속의 여인)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미련)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봐도" (커피 한잔). 신중현은 사랑.그리움.미련.여인 등 가장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감성들을 노래에 담았고, 그것은 아주 쉽고 빠르게 대중의 정서에 스며들었다.

반면 한대수의 노래에선 철학적 내음이 배어났다. 그의 대표곡인 '물좀 주소' 는 자유가 제한되던 암울한 시대의 갈증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바람과 나' ' 행복의 나라로' 등의 노래에서 그의 색깔은 더욱 명확했다. 그가 말하는 '물' 과 '바람' 과 '행복의 나라' 는 자유.이상을 향한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었다.

그래서 한대수는 청바지.통기타.생맥주로 대변되는 70년대 청년문화의 선두주자로 거론된다.

그의 노래는 권력의 일방통행에 반기를 든 저항의 싯구였고, '주검의 시대' 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현이었다.

그러나 한대수는 "그 시대의 정책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당시 나의 노래는 나의 일기처럼 일상을 읊은 것에 불과하다" 고 회고한다.

둘 다 싱어송 라이터라는 점에선 닮았지만, 신중현은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활약하면서 '프로 뮤지션' 의 역량을 톡톡히 발휘했다. 그는 펄 시스터즈.김추자.장현 등과 같은 당대의 빅스타들을 발굴해 키워냈다.

특히 펄시스터즈의 '님아' 가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그가 작곡한 노래는 스타로 가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70년대 중반, 그는 가요계 최고의 '스타 제조기' 였다. 그는 대단한 음악 열정에, 도전적인 창작을 중시하는 프로 뮤지션이었다.

가수를 쉽게 선택하지 않는 그는 새목소리를 찾아 가수를 잘 바꿔서 일부에선 그를 향해 "도대체 인정이 없다" 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중현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것은 바로, 남다른 프로정신이었다.

반면 한대수는 한마디로 '바람' 같은 사람이다. 개인적인 성향이 그렇고, 음악적인 세계가 그랬다.

한대수에게 음악은 목표가 될 무엇이 아닌, 그냥 공기를 마시듯 호흡하는 '놀이' 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난 한번도 가수가 되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그가 국내에 일찍이 포크를 선보일 수 있었던 데에는 일찍이 그가 미국생활을 경험한 개인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청소년기와 청년 시절을 보냈다. 두번 째 앨범이 판매금지 조치 당하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시를 쓰며, 틈틈이 음악활동을 하는 전방위 예술가였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온 그들이지만, 두 사람은 70년대 중반(정확히는 1975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둠의 시대' 로 꼽는다.

2집 '고무신' 을 발표한 한대수는 녹슨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린 자켓사진이 문제가 돼 '체제 전복적인 음악인' 으로 낙인찍혔다.

수록곡 전체는 물론 덩달아 1집 노래들까지 금지곡이 됐다.

사실과 관계없이 '신중현은 같은해 대마초때문에 가수로서의 활동에 족쇄가 채워졌다.

'대마초 가수' 로 낙인찍힌 신중현은 규제에 묶여 80년까지 5년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신중현은 당시를 회고하며 "그 정권(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기 하루 전까지 내겐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고 털어놓았다.

80년 규제가 풀리고 난 뒤 밴드를 결성해 노래를 불렀지만, 대중들은 더이상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감쪽같이 대중들의 추억 한 켠에 자리잡은 '과거형 가수' 가 될 뻔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자라난 세대들은 그들의 음악성과 개성, 그리고 장르적 진보성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신중현의 주옥같은 곡들은 후배가수들에 의해 부지런히 리메이크되면서 다시 주목을 끌었다.

이선희가 '아름다운 강산' , 봄여름가을겨울이 '미인' 을, 조관우가 '님은 먼곳에' 를 다시 불러 인기를 모았다.

97년엔 후배가수들이 그에게 바치는 '헌정음반' 이 발표됐고 98년엔 신중현을 듣고자라 한국의 60~70년대 록을 카피연주하는 일본 록밴드 '곱창전골' 까지 생겨났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해탈한 목소리로 오랜만의 98년에 새음반 '김삿갓' 을 발표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너희가 록을 아느냐' 는 타이틀로 데뷔 30년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최초의 대형 콘서트 무대를 가졌다.

한대수도 97년부터 가수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97년 후쿠오카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지난해 '고무신' 을 CD로 복각해 재발표하는 한편 양희은 등과 잇달아 콘서트를 가지며 팬들과의 재회를 이어갔다.

올해 다시 '멀고 먼 길' 의 CD복각판을 낸 한대수는 조만간 새앨범을 선보일 계획이다.

글〓이은주.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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