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북 정상회담] 남북 경협 30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까지 남북경협의 30년사는 도전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 경제회담 시대〓경협 논의는 7.4 남북공동성명과 78년 6.23선언 5주년 특별담화를 통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북한에 남북경제회담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는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렀고 진척은 80년대 중반에야 이뤄졌다.

84년 북한이 회담 개최를 수락하면서 이듬해까지 5차례 진행됐다. 그러다 86년 6차 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이유로 회담을 무기 연기하며 좌절을 맞았다.

정부는 그 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눈을 돌렸고, 동유럽.중국.소련에 무역관을 설치하며 '선(先)경제-후(後)정치 교류' 의 외교 전략을 마련했다. KOTRA 홍지선 북한실장은 "동구권 진출이 북한과 물꼬를 트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고 말했다. 88년 7.7선언을 통해 남북교류를 민족 내부거래로 규정하는 등 문호를 개방하면서 경협은 새 전기를 맞는다.

◇ 민간기업의 부상〓88년 ㈜대우가 북한산 도자기를 반입하면서 김우중(金宇中)전 대우 회장이 초기 남북교역을 주도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92년 1월 金 전 회장은 북한을 방문해 남포공단에 9개 경공업 협력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 사업은 국내 기업의 대북사업 첫 작품이다.

그러나 이 역시 북한 핵문제로 남북관계가 다시 냉각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대우 관계자는 "건별로 사업 승인을 받아야 했으며 투자.인력활용 등의 규제도 심했다" 고 말했다.

핵 문제로 긴장이 고조되자 정부가 경협사업을 핵문제 해결의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북한 김달현 부총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정부는 "남포 합작사업을 위한 조사단 파견이 곧 실질적인 사업추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핵문제 등의 진전 상황에 따라 본격적인 추진 시기 등이 결정될 것" 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대우는 사업 신청을 한 지 3년 뒤인 95년에야 승인을 받았다.

◇ 제네바 합의와 쌀 협상〓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성명을 내면서 경협 논의도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에 서명하기까지 공식적인 방북신청과 대북사업 승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 부문에선 인천~남포간 항로가 열리고, 대우의 임가공 공장이 북한에 지어지는 등 경협 노력은 계속 진행됐다.

LG.삼성.현대.쌍용 등의 대북사업 담당자들은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사업 현안을 논의했다. 이 때문에 제네바 협상 타결 후 정부가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 를 발표하자마자 6개 기업이 동시에 방북 신청을 하는 등 방북 러시가 이어졌다.

또 그해 처음으로 남북교역액이 2억달러를 넘어섰다. 95년 6월 북한의 식량난을 덜어주기 위한 쌀 15만t지원은 경협 활성화의 상징적인 계기가 됐다.

북한과의 우호 관계가 조성돼 기업인들은 방북을 준비하면서 겪던 심적 부담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 금강산 관광〓최근의 돌파구는 현대가 만들었다. 정주영(鄭周永)전 명예회장이 98년 소떼를 몰고 방북, 금강산 관광에 대한 극적인 합의를 이뤄냈다.

이 사업은 현대에 적자를 안겨주고 있으나 민족적 사업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 합의한 서해안 공단개발 등 다른 사업은 일부 연기되면서 진행 중이다.

이용택.서익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