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동북아 체스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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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체스로 불리는 서양 장기는 고대 인도의 차투랑가 게임에서 유래했다. '차투르' 는 산스크리트어로 넷을 뜻하고 '앙가' 는 조(組)를 의미한다. 네명이 편을 갈라 벌이는 전쟁형식 게임이 차투랑가였다. 게임이 처음 등장한 6세기 무렵 인도 군대는 코끼리부대.기병대.전차대.보병대의 4군편제였다. 2인게임으로 변형된 차투랑가는 동양으로 전래돼 장기(將棋)가 됐고, 페르시아와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도 전파됐다.

15세기께 체스라는 용어가 처음 선보였다. 말(馬)의 모양과 행마(行馬)규칙도 오늘날과 비슷하게 바뀌었고 게임의 기본전술 개념도 생겨났다.

유한(有閑)귀족들의 게임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체스가 대중 사이에 급격히 확산된 것은 산업혁명 이후였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체스규칙은 1924년 파리에 국제체스연맹(FIDE)이 창설되면서 정비되기 시작해 47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국제규칙이 확립됐다.

체스는 두사람이 가로.세로 각각 8칸씩 모두 64칸이 그려진 정사각형 체스판 위에서 벌이는 전술게임이다. 두사람이 흑과 백 각각 16개의 말을 움직여 상대방의 킹을 먼저 꼼짝못하게 하는 사람이 이긴다.

기본원리는 동양 장기와 같다. 동양 장기에서 말의 가짓수가 7종인 데 비해 체스에서는 킹.퀸.룩.비숍.나이트.폰 등 6가지다. 물론 말마다 행마법이 다르다. 상하좌우.대각선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퀸은 폰 9개의 가치를 갖고, 룩은 폰 5개, 비숍과 나이트는 폰 3개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각 말의 상대적 가치는 포진(布陣)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전술이 필요하고 몇수를 미리 내다보는 고수를 하수가 꺾기 어렵다. 국제정치는 흔히 체스판에 비유된다. 세계경략(經略)을 꿈꾸는 열강들이 행마와 포진을 놓고 벌이는 수 싸움이 체스 게임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미 지미 카터 행정부의 안보담당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는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 이란 최신 저서에서 세계라는 체스판에서 미국이 구사해야 할 21세기 전략과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체스판 위의 말들로 중국.러시아.프랑스.독일.인도 등 5개 게임참가국과 우크라이나.아제르바이잔.한국.터키.이란 등 5개 고려대상국을 상정하고 각 말을 어떻게 상대하고 다뤄야 할지를 설명하고 있다. 초강대국용 체스 교본인 셈이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주변 열강들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폰이 움직이자 퀸도 뛰고 룩도 뛰고 비숍도 뛰는 꼴이다. 정상회담 이후 동북아 체스판에 전개될 포진과 행마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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