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선진화 막는 낡은 의료법 ③ 소비자는 훨씬 앞서 가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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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보훈병원 가정의학과 전태희 과장이 서울 도봉구 양로원에 거주하는 김주선씨를 원격 상담하고 있다. 모니터 속에 김씨의 얼굴이 보인다. 의료법 조항 때문에 이 서비스는 이달 끝난 다. [오종택 기자]

“연세에 비해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어디 아픈 곳은 없으세요.”(의사)

“얼마 전에 갑상선에 뭐가 생겼다고 들었어요. 관절염 약을 먹는데 몸이 좀 부어요.”(환자)

“갑상선은 예후가 좋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15일 오후 3시 30분. 서울 강동구 둔촌동 서울보훈병원. 가정의학과 전태희 과장이 컴퓨터 모니터로 김주선(84·여)씨와 상담하고 있다. 김씨는 서울 도봉구 ‘자애로운 성모의 집’ 거실에서 인터넷TV(IPTV) 화면으로 전 과장을 만나고 있다. 전 과장 진료실과 양로원에는 웹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김씨는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 상담받을 수 있어 신기하다”며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이렇게 진료받을 수 있으면 걱정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김씨가 받은 서비스는 원격(遠隔) 의료의 한 형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LG데이콤이 시행하는 IPTV를 활용한 원격 건강 관리 서비스다. 보훈·분당서울대병원 등이 11월부터 200가구를 상담하고 있다.

이 서비스는 이달 말이면 끝난다. 두 달간 시범 사업을 하도록 허용됐기 때문이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인과 의료인 간 원격 진료를 허용한다. 가령 작은 병원의 의사가 큰 병원의 의사에게 도움받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원격 진료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LG데이콤 관계자는 “원격 상담 서비스는 기술적으로 어려울 게 없지만 이달 이후 일반인을 상대로 서비스하면 불법”이라고 말했다.

심평원 사업처럼 정부가 인정한 시범 사업이나 연구·개발 사업만 환자와 의사 간 원격 진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시범 사업은 한시적인 무료 사업이라 일반인들에게 서비스되지 않는다. 정부는 1988년부터 21년째 교도소·강릉시 등 60여 곳에서 시범 사업만 하고 있다. 93%의 환자가 만족했다. 그런데도 일반인 대상 원격 진료는 계속 금지돼 왔다.

36년 전 의료법이 유비쿼터스(Ubiquitous) 헬스(U헬스)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정보기술(IT)과 의료가 결합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가 움트려다 얼어붙고 있다. 서울대 의대 김주한 교수는 “집에서 혈당수치·혈압·맥박 등을 재거나 대소변을 자동 체크해 데이터를 의료기관 등으로 보내고, 이상 유무를 체크해 대책을 세우는 원격 건강 관리 서비스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얼마 전 지방의 한 의대 교수는 기업 근로자들의 혈압·심전도 등의 데이터를 인터넷으로 전송받아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의학적인 소견서를 작성해 당사자들에게 보냈다가 면허 정지 처분을 당했다. 연세대 의대 김소윤 교수는 “의료법 규제 때문에 시장이 불확실하다 보니 기업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고, 일부 기업은 미국으로 나가 U헬스 장비를 테스트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일반인의 건강을 평소에 관리해 주는 서비스를 속속 선보이고 있지만 이것도 의료법이 막고 있다. 의사가 아닌 기업이 유사 의료 행위를 한다는 논란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 관리 서비스 기업인 에버케어 김신실 부사장은 “고객에게 가장 적합한 병원을 골라 소개하면 의료법 소개·알선 금지 조항에 저촉될 수 있어 여러 개의 병원을 제시하고 환자가 선택하게 한다”고 말했다.

☞◆원격 의료, U헬스=환자가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 인터넷· IPTV 등으로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게 원격 진료다. 화상 진료, 원격 X선 판독, 건강 상태 체크 등을 포괄한다. 고혈압·당뇨 등 만성 질환자에게 적합하다. 유·무선 네트워크, 각종 센서 등 정보통신 기술과 의료를 결합해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U헬스라고 한다.

◆특별취재팀
신성식·안혜리·강기헌 기자,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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