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이승만 대통령 수석고문 로버트 올리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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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달 29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숨은 공신이자 미국내 '지한파' (知韓派)의 원조격인 인사다.

그는 이승만(李承晩)박사의 국제정치고문을 맡아 유엔을 무대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막후에서 전개해 건국의 초석을 마련했고, 건국후엔 대통령 수석고문으로서 한국 실정을 미국 조야에 알리는 메신저 역을 수행했다.

또 李 전 대통령이 가장 속내를 많이 드러낸 측근이었지만 독재의 길로 접어든 그에게 수차례 용퇴를 권유했던 '충신' 이기도 했다.

유영익(柳永益.64)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장은 "한국의 독립 및 건국은 물론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에 이르기까지 올리버박사의 공로는 매우 컸다" 고 평가했다.

김동조(金東祚.82)전 외무장관도 "건국초기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우리나라의 실정을 홍보해준 '절반의 한국인' 이었다" 고 기억했다.

올리버박사와 李박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1942년 9월 어느날 워싱턴 근교의 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펜실베니아주 버크넬대에서 수사학을 강의하던 33세의 소장학자 올리버는 67세의 망명 노정객의 독립에 대한 열정에 매료됐다.

올리버는 방한시 인터뷰를 통해 李박사와의 첫만남에서 '절제된 위엄' 에 감복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초대 대통령이 된 李박사는 올리버박사를 각별히 배려했다.

그는 경무대(景武臺)의 집무실 바로 옆에 올리버 박사의 개인 사무실을 마련해 두곤 수시로 흉금을 털어놓았다.

그는 한해의 절반이상을 한국에 머물며 외교문제 뿐 아니라 국내정치 현안까지 李 전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며 해결책을 찾는데 협력했다.

하지만 때론 직언도 서슴지 않아 충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柳소장이 전하는 일화 한토막. 李대통령은 평소 영어연설문은 올리버박사에게 대부분 맡겼으나 54년 워싱턴을 방문할 때는 그에게 원고를 보여주지 않았다.

올리버박사가 수차례 "초안을 보여달라" 고 간청했으나 李박사는 이를 무시하고 상하양원 합동의회에 나가 " '제3차대전을 각오하고라도' 소련과 중공을 견제해야 한다" 는 요지의 강경발언을 했다.

이 연설은 미국 의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李박사에 대한 지지를 철회케 하는 역효과를 냈다. 올리버박사는 생전 두고두고 이를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李 전 대통령이 점차 장기집권의 길로 접어들자 그는 미국에서 사신을 보내 56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만류했다.

그러나 李박사가 출마를 강행해 당선하자 59년엔 다시 "장면(張勉)박사나 조병옥(趙炳玉)박사를 후계자로 삼을 것" 을 권유했다.

그러나 李박사는 "장면은 애국심도 많고 능력도 있지만 너무 약하고, 조병옥은 무절제한 사생활이 마음에 걸린다" 며 끝내 그의 충고를 거절, 마침내 4.19혁명으로 불명예 퇴진하게 된다.

하지만 李박사의 하야 후에도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계속됐다. 그는 워싱턴에 '코리안 퍼시픽 프레스' 라는 출판사를 차려 홍보활동을 계속했고 노년까지 한국에 대한 저술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올리버박사와 말년까지 서신을 주고 받아온 李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李仁秀.69)씨는 "건국 전후의 어수선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그는 큰 기여를 했다" 고 전하고 "한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오히려 한국인 이상이었다" 고 애도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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