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왕회장의 큰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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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 계동 현대 사옥은 그룹의 심장부다. 15층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집무실이 있고, 한층 아래 14층에 정몽구 자동차 회장, 그 두층 아래인 12층에는 정몽헌 회장의 집무실이 각각 자리잡고 있다.

건물 앞 대리석 탑에 진하게 새긴 現代란 '그룹' 명칭과 명예회장.회장이란 직함 등을 모두 없어지게 만드는 5.31 폭탄선언 이후 이 건물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사실상 장자인 정몽구 회장이 부친인 왕회장의 동반퇴진 선언을 강력 반발하고 나선 가운데 현대자동차는 1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몽구 회장의 대표이사 회장직 유지를 결의했다.

비슷한 시각 그룹 홍보실에선 정몽헌 회장이 서명한 각서를 보이며 몽헌 회장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표이사와 이사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지켜보는 직원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일부 직원들은 '한번도 아니고 두차례나 다투는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없다' '창피하다' 고 털어놓기도 했다.

현대 사태는 지난 4월 하순 현대투신의 자금사정이 어렵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비롯됐다. 그로부터 한달여 만에 오너 3부자의 동반퇴진 선언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초래했다.

이 문제는 얼핏 보면 재벌 그룹의 창업자와 그 두 아들 형제가 회장직에서 한꺼번에 물러나기로 함으로써 그동안 정부가 추구해 온 재벌개혁의 획을 긋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공식적으론 경영에서 손뗀다고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관여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런데 왕회장의 5.31 결심을 들여다 보면 지금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박수만 치기에는 상황이 급박하다.

우선 현대는 3부자가 퇴진한다고만 했지 앞으로 경영을 책임질 전문 경영인을 분명하게 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갑작스런 회장의 퇴진은 일시적으로 경영의 공백 현상을 가져올 수도 있다. 물러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분명하게 책임지는 자세가 이 시점에선 더 필요하다.

현대 사태 이후 자금사정이 어려운 한계기업들이 더욱 고전하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대기업은 '경영 안보' 를 위해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확보하려 들고 있다.

정부가 신경써야 할 대목이다. 특히 현대로선 새천년을 맞아 본사 사옥 앞에 조형물을 만들고 새긴 '21세기 현대 파워 점프 2000' 이란 슬로건의 빛이 바래지 않도록 지금부터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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