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DJ를 ‘노인네’라 불러 … 정상회담 일정도 즉석에서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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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에 나가라’는 DJ의 권유로 출마 준비에 들어갔다가 ‘여론이 안 좋다’는 DJ의 말에 뜻을 접어야 했다. 처음에 권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포기하라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하고 서운했다….”

김대중(DJ)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1999년 11월∼2001년 9월)을 지낸 한광옥(사진)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14일 자서전 『한광옥의 선택-포용과 결단의 리더십』(내년 1월 출간 예정)을 탈고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비서실장 재직 시절과 서울시장 출마 포기에 얽힌 비사 등을 소상히 털어놨다. 4선 의원을 지낸 한 전 대표에겐 요즘 내년 재선거가 예정된 서울 은평 지역에 출마하라는 여론이 지역 내 오피니언그룹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고 당 관계자가 전했다.

자서전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북, 금수산 궁전 참배를 철회한 까닭은=2000년 6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지만 북측은 일정을 전혀 알려주지 않아 긴장의 연속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인네(DJ)가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내일 여기로 오죠”라고 말하면 회담 장소가 즉석에서 결정되는 식이었다. 김정일이 순안공항으로 DJ를 마중 나온다는 연락도 착륙 2∼3분 전에 받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북측은 김일성 주석 시신이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을 DJ가 참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는 “정 그렇다면 대통령 대신 비서실장인 내가 가겠다. 내 참배가 (남한의) 실정법 위반이라면 남한에 가서 책임지겠다고 전해 달라”고 북측을 압박했다. 결국 북측은 참배 요구를 철회했다.

◆DJ의 ‘언론 개혁’에 반대=2001년 1월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에 앞서 (대통령과) 회견 원고를 읽는 독회를 가졌다. 남북 평화, 경제 향상과 함께 ‘언론 개혁’ 언급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임기 말 시점에서 때가 좀 늦었고,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고 두 번이나 지적했다. 언론 개혁은 (정부의) 제재나 위협보다는 언론기관의 자율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소신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뜻은 확고해 결국 회견에서 언론 개혁을 발표했다. 이는 언론계에 폭풍을 예고했다.

◆서울시장 출사표 접은 사연=98년 노사정 대타협을 성공시킨 직후 DJ는 내게 “한 동지는 뭘 하고 싶소”라고 물었다. “대통령님 뜻에 따르겠다”고 답하자 그는 “서울시장에 출마하시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얼마 뒤 DJ는 나를 불러 “한 동지가 출마하면 여론이 안 좋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정보기관에서 여론조사를 빙자해 그런 보고를 했다는 짐작에 화가 나 “국민의 정부에서도 정보기관이 정치공작을 하느냐”고 말했다.

DJ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론조사를 더해 보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청와대를 나서자마자 “한광옥이 시장 출마를 포기했다”는 방송 보도가 나왔다. 내가 DJ를 만나기도 전에 정보기관이 보도자료를 뿌린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곧 DJ가 다시 나를 찾았지만 나는 아내와 함께 서울을 떠나버렸다.

사흘 만에 청와대에 들어가자 DJ는 “마음고생이 심했다”며 다른 자리를 여럿 제안했다. 나는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된 고건씨의 당선에 힘을 보탰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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