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서 자라는 굴이 더 크고 맛있다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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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정승훈 씨에버 사장(왼쪽)과 박영제 갯벌연구소장이 충남 태안의 갯벌 양식장에서 기른 굴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경빈 기자]

그 굴은 크기부터 달랐다. 큰 것은 껍데기가 어른 손만 했다. 껍데기를 따자 꽉 찬 살이 드러났다. 색은 여느 굴처럼 회색이 아니라 노란 기운이 감도는 우윳빛이었다. 지난 3일 씨에버(www.seaever.co.kr)라는 양식업체의 충남 태안군 진산면 양식장에서 본 굴은 이랬다. 씨에버 정승훈(49) 사장이 한번 맛보라고 권했다. 큰 굴은 좀 부담스러워 좀 작은 걸 골랐다. 껍데기가 휴대전화보다 약간 큰 정도로, 1년쯤 됐다고 했다. 산 굴을 껍데기에서 바로 떼어 입 안에 넣었다. 조심스레 씹어 봤는데 입에서 녹는 듯했다. 닷새 전 맛봤을 세계미식가협회 회원들은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갯벌 양식 국내 첫 시도한 씨에버

갯벌 굴 중 큰 것을 휴대전화 크기와 비교해봤다. 길이 20㎝, 폭 10㎝ 정도로 어른 손만했다.

씨에버의 굴은 지난달 28일 서울 반포동 JW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세계미식가협회의 셰인 디너(Chaine Dinner·특별 만찬)에서 애피타이저(전채)로 등장했다. 여기 모인 전 세계 100여 명의 미식가가 맛봤다. 거의 두 달간 만찬을 준비했다는 프랑스인 주방장 프레데릭 네프는 “굴의 향미가 독보적이다. 셰인 디너에 어떤 요리들을 선보일까 고심하다가 이 굴을 맛보고 전채로 삼았다”고 말했다. 네프는 마침 특급호텔 등을 접촉하던 씨에버 마케팅 직원과 만나 이 굴을 알게 됐다.

정 사장에 따르면 굴 맛은 기르는 방식에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굴은 수심 약 20m의 얕은 바닷속에서 기르는 게 보통이지만 씨에버의 굴은 갯벌에서 기른다. 철근으로 높이 40㎝가량 되는 평상 모양의 틀을 짜고, 그 위에 굴을 넣은 플라스틱망을 얹어 놓는다. 굴은 밀물 때면 물속에 있지만 썰물 때는 밖으로 드러난다. 여름엔 30도를 넘는 더위와 땡볕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겨울엔 영하 10도 가까운 추위 속에서 찬바람을 견딘다. 국립수산과학원의 박영제 갯벌연구소장은 “극한 상황을 겪는 생물은 만일에 대비해 몸에 여러 영양분을 쌓아 놓는다. 같은 이치로 갯벌에서 자란 굴은 아미노산 등이 풍부하다. 그게 맛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갯벌 굴 양식은 국내에서 정 사장이 처음 시도했다. 원래 물 거르는 연수기 제조업을 하던 그가 굴 양식에 한눈을 판 건 1995년. TV를 보다가 프랑스인이 해변에서 와인과 굴을 즐기는 모습에 눈길이 꽂혔다. “우리는 죽은 ‘알굴’을 먹는데 유럽인들은 껍데기에 붙은 생굴을 먹는 거예요. 알아보니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나라는 대개 그렇다더군요. 우리나라도 와인과 생굴을 즐기는 때가 올 거란 생각이 들었지요.”

프랑스의 지인에게 물어보니 그곳에선 굴을 갯벌에서 키운다는 걸 알게 됐다. 양식 설비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해서는 충남 서천에 똑같은 시설을 꾸미고 굴 전문가와 함께 양식을 시작했다. 종자는 국산 참굴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95년부터 7년 내리 실패였다. 폐사율이 높았던 것. 굴이 하루에 몇 시간 물 밖에 나와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시작한 탓이었다. 어떤 해엔 태풍에 시설까지 휩쓸려 갔다. 연수기 사업에서 번 돈 중 20억원을 날렸다.

“포기할까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다른 일로 프랑스에 가게 됐어요. 간 김에 굴 양식장을 찾았죠. 눈길 끝닿은 데까지 갯벌 양식장이 훤히 펼쳐져 있더군요. ‘이 사람들 이렇게 잘하는데…’ 하는 오기가 샘솟더군요.”

귀국해 다시 힘을 쏟았다. 양식이 성공하기도 전에 충남 서천에 양식용 새끼 굴을 생산하는 종묘장과 다 키운 굴을 포장하는 생산시설을 지어 배수진을 쳤다. 폐사율은 점점 낮아지고 마침내 채산이 맞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충남 태안에 양식시설을 지어 굴을 길렀다.

갯벌 양식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당시 국립수산과학원 서해연구소 증식과장이던 박영제 소장에게 들렸다. 박 소장은 진작부터 갯벌에서 굴을 양식하려고 시도하는 기업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눈여겨봐 오던 터. 이 양식 기법을 어민들에게 보급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갯벌 굴은 바닷속에서 기른 굴보다 다섯 배가량 비싸게 팔린다. 1만㎡(약 3000평)의 갯벌에서 기르면 최대 1억5000만원까지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씨에버는 굴을 키우겠다는 어민들에게 양식 시설과 새끼 굴을 공급하고, 키운 굴을 내다 파는 유통망이 되기로 했다. 마침 조윤길 충남 옹진군수가 군내 어민들에게 갯벌 굴 양식을 보급해 보겠다고 나섰다. 국비 25억원을 지원받고, 인천시와 옹진군이 총 25억원을 투자해 경기도 연평도와 영흥도 갯벌에서 양식을 시작했다. 결실을 거둬 올 초부터 씨에버를 통해 국내 특급 호텔과 유명 레스토랑에 공급했다. 이탈리아 말로 ‘태양(sole)’을 따서 오솔레(Osole)라는 제품 브랜드도 지었다. 햇빛을 받고 자란 굴이란 의미다.

최근엔 박준영 전남지사가 전 사장을 찾았다. 전국 갯벌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전남의 갯벌을 굴 양식장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씨에버는 일본 등지로의 수출도 모색하고 있다. 수출을 하려고 박영제 소장과 함께 정부로부터 양식장 주변 바다가 ‘청정 해역’임을 인증받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정 사장은 “굴은 자라면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CO₂)를 빨아들여 껍데기를 만든다. 굴 한 마리가 클 때까지 CO₂150g 정도를 흡수한다고 하니 굴 양식은 ‘녹색산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태안=권혁주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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