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방한, 한국 국민들이 환영한다면 괜찮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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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호 04면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간사장이 12일 오전 서울 정릉동 국민대학교 학술회의장에서 ‘새로운 한·일 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긴 역사를 되짚어보면 양국 간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념으로 파악해야 할 관계가 아니라고 본다.” 오자와 간사장이 특별 강연에서 강조한 한·일 양국의 밀접성이다. 그는 이날 국민대 학술회의장에서 학생, 일본학 연구소 연구원 등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연을 했다. 주제는 ‘새로운 한·일 관계와 그 역할을 담당할 리더의 육성’. 그는 “한국과 일본은 민족적으로나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관계다. 양국 현대사 중에는 불행했던 시기가 있었고 일본과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사만을 계속 말하고 생각하면 장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젊은 여러분은 과거의 여러 문제를 초월해 양국 친선 관계와 연대감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서울 온 日 실세, 오자와 민주당 간사장

고대부터 한·일이 가까운 관계란 점을 말하면서 도쿄대 고고 역사학자였던 에가미 교수로부터 자신이 들은 ‘기마 민족 일본 정복설’을 소개했다. “한반도 남부 지역 권력자가 바다를 건너와 지금의 나라현에서 정권을 수립했다고 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더 강조하게 되면 일본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더 강하게 얘기할 수 없다”고 할 때는 청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키히토 천황도 8세기 일본의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했다”며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까운 나라로, 상호 간 진정한 신뢰·협력 관계를 조성한다면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 안정에 중요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자와 간사장은 이날 아키히토 일왕의 내년 방한 가능성도 언급했다. 강연에 이어 조훈현 9단과 대국을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 국민이 받아들이고 환영한다면 (내년 일왕의 한국 방문이)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 9월 이명박 대통령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내년 일왕 초청 의사를 밝혔다. 일본 정부는 ‘일왕이 정치에 관련된 행동은 할 수 없도록 헌법에 규정돼 있다’고 했었다.

간사장은 강연에서 한·일 양국 문제 해결에서 일본의 적극적 역할을 더욱 강조했다. “양국 간에 아직 존재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를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한국의 책임이라기보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제시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라고 했다. 재일동포 등 외국인 지방참정권에 대해서도 전향적이었다. “일본 정부가 법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토야마 총리와 현 정부 내각은 생각이 같다고 본다”며 “내년 국회에서 현실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일본이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국민대 강연하고 이 대통령도 예방
“역사적으로 중국은 주변국, 특히 한반도와 일본에 문화·경제·군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아시아의 대국”이라며 “중국과 한·일 3국이 연대를 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동북아, 극동지역은 정치체제와 경제 구조가 다른 국가들이 현실적으로 근접해 있어 매우 불안한 지역”이라며 “안정된 평화 지역으로 조성하는 것이 한·일 양국 국민에게 부과된 과제”라고 강조했다.

“어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엔 기다렸다는 듯 ‘한류’를 언급했다. “일본 사회는 한국의 문화적인 면을 아무 저항감이나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며 한국 드라마 ‘대장금’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인데, 김치만 있으면 밥은 몇 공기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청년이나 대학생에게 인생의 조언을 해 달라’는 취지의 질문에는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인간으로서 상호 유대감을 심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 생각 없이 대학을 다니거나 시간을 보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교육 문제를 얘기하면서 그는 일본의 관료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비판적 시각도 드러냈다. “학교 공부만 잘해선 안 된다. 공부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학창 시절 공부만 열심히 해 도쿄대 같은 유명 대학을 졸업한 뒤 엘리트로 인정받아 중앙관청에 들어가는데, 일본에서 가장 나쁜 평을 받는 사람들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리더가 되기 위해선 높은 뜻을 품고, 어떤 분야에서 일하려 할 때는 필요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넓혀야 한다”며 “나는 청소년 시절 서양과 동양 역사를 넘나들며 역사 소설과 역사서를 탐닉했다”고 했다. 그는 “여러분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가고 싶다. 이뤄질 수 없는 꿈이란 것을 안다. 여러분 나중에 후회하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일본 국민에 대한 평가도 솔직했다. “일본 국민은 긴 역사 속에 섬나라여서 다른 나라보다 평화로운 생활을 해 왔다. 그래서 판단하고 행동한 뒤 책임지는 자립심이 결여돼 있다”고 했다. 자립심은 중요한 리더의 자질이라고도 했다. 미국민에 대한 평가도 곁들였다. 오자와는 “미국민을 좋아하긴 하지만, 좀 단순한 면이 있다. 좋은 점이기도 하고 나쁜 점이기도 하다”고 했다. 미국 정치인 가운데는 닉슨을 좋아한다고 밝힌 그는 “닉슨은 미국에선 평이 나쁘다. 나도 평이 나쁘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의전 차량 사양하고 렌터카로 다녀
강연장인 국민대 학술회의장에는 시작 한 시간 전인 오전 9시부터 일본 언론사의 카메라가 진을 치기 시작했다. 중국 방문부터 수행한 기자 13명과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 20여 명이 몰렸다. 8월 총선에서 자민당 54년 체제를 종식하며 일본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오자와의 힘과 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을 반영했다. 11일 시작된 오자와의 방한은 철저히 개인 방문 형식이었다. 1년 반 전 국민대 일본학 연구소장 이원덕 교수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본 국회의원 143명을 포함, 600여 명의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하던 중 일행을 남겨두고 한국으로 온 그는 수행원 3명만 대동했다. 주한 일본 대사관에는 “개인 방문이니 신경 쓰지 말라. 세금 낭비하면 안 된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가 제의한 의전 차량도 사양하고 직접 임대한 검은색 ‘스타크래프트’ 승합차에 4명이 타고 다녔다. 그는 정책 관련 내용에 대해선 “질문해도 답할 수 없다”고 못 박았는데 하토야마 총리와의 관계를 의식한 듯했다.

오자와는 강연 내내 원고를 거의 보지 않고 옆집 아저씨 같은 소탈한 분위기로 말을 했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연 속에서 살아온 어린 시절도 언급한 그는 “어머니가 ‘남자는 절대 변명해서는 안 된다. 절대 울어선 안 된다’고 교육해 이를 신념으로 지켜왔는데 이 때문에 언론들로부터는 좋은 평을 듣지 못하는 것 같다”며 여러 번 일본 언론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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