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산책] 무너지는 프랑스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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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제53회 칸 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에서 자국 영화의 현실에 대한 자성론이 일고 있다.

'영화의 종주국'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영상미 넘치는 예술 영화의 본산' 이라는 자긍심은 요즘 프랑스에서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객들도 프랑스 영화를 외면한 지 오래다.

지난해 '아스테릭스' (관객 9백만명), 올해 '택시2' (개봉 1주만에 3백만명 관람)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긴 했다.

그러나 프랑스 영화를 찾는 사람은 전체 관객의 30%도 안된다.

지난해 개봉된 프랑스 영화 1백80편 가운데 단 3편 만이 본전을 건졌다.

1998년에도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1백34편 중 20여편에 불과했다.

이같은 현실은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영국.스페인 등 유럽국가 대부분의 영화사들이 지난 20여년간 TV와 할리우드 영화에 고객을 빼앗겨 문을 닫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80년대 초만 해도 흑백TV 수상기를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가 볼만한 프로그램이 있을 때만 사용했다.

이제는 프랑스인들에게도 TV가 오락과 레저를 즐기는 첫번째 수단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영화사들은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유유자적해 왔다.

국가 차원의 지원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TV 방송이 영화 제작비용 중 일정액을 부담한다.

그래서 영화 제작자들은 극장에 손님들이 들건 말건 신경 안쓰고 '땅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지난해 국제무역기구(WTO) 회의에선 영화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파스칼 로가르 프랑스 영화수출협회장은 "이같은 지원이 프랑스 영화산업을 허약체질로 만드는 주범이 됐다" 고 지적한다.

TV 방송이 돈을 대다 보니 대부분 영화가 극장의 대형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형사물.심리극 등 장르의 다양성도 사라지고 안방에서 온가족이 보고 웃을 수 있는 '비지터' '아스테릭스' 같은 대중 오락물들만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대중오락물이라면 프랑스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를 따라잡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프랑스에선 지금 영화와 TV의 연결 고리를 끊느냐 마느냐가 딜레마로 등장하고 있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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