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풍납토성, 정부 결단만 남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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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유적이 훼손됐다면 민족적 수치다.

특히 그 유적이 이민족의 것이 아니라 자국민의 조상이 남겨놓은 유산이라면 더욱 따가운 지탄을 면치 못한다.

지금 온 국민이 흥분한 풍납토성의 보존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풍납토성은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유적으로 판단한 바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부근의 석촌동 백제시대 왕릉과 몽촌토성.이성산성과 연계된 한국 고대사의 현장이 확실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이 유적이 우리에게 보여줄 역사적 자료는 지금 발굴 초기에 나타나고 있는 유물들의 성격만 봐도 메가톤급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서울의 역사를 조선시대 5백년에서 다시 1천5백년을 끌어올리는 증거들을 무수히 담고 있는 역사의 보물 창고가 바로 풍납토성과 그 일대의 땅이다.

1960년대 이 유적이 처음 발굴됐을 때 풍납동 일대는 초가도 섞여 있는 도시화 이전의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다.

필자는 그 때 발굴에 참가했던 한 사람으로 지하에 무수히 매장돼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들을 다 꺼내지 못하고 서둘러 덮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유물이 너무나 많고 성격을 알 수 없는 유적이 시루떡처럼 포개져 발견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고고학계의 발굴 경험으로는 유적의 존재만 확인할 수 있었고 더 이상 손대서는 안되겠다는 게 현장의 판단이었다.

그 후 서울올림픽 때 백제고분들이 불도저에 밀려 없어지는 현장을 필자 등이 목격하고 공사주인 서울시를 설득하다 못해 언론의 도움을 받아 공사를 중지시켰으며, 발굴 조사하고 도로는 지하로 지나가게 됐다.

그 도로가 오늘날의 백제고분로이고 그 때의 고분들이 오늘날 5기의 백제왕릉이다. 그 때 올림픽대교의 남단 도로에 걸려 함께 파괴될 운명이었던 몽촌토성도 학자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공원화됐고 도로는 우회하게 된 것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문화재 보존 정책은 진보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다. 풍납토성은 이미 30년 전에 국가 사적(史蹟)으로 지정됐다. 그 이후 정부와 서울시는 이 유적의 보존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 묻고 싶다.

정부와 서울시의 문화재 담당자들이 무지해 이토록 중요한 유적 위에 벌집처럼 무수한 건물이 들어서도록 방치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당국자들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유적 보존의 일차적 책임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져야 한다. 오늘의 풍납토성 문제는 사적지정 때 토성 부분만 지정되고 성의 내부와 주변지역은 빠졌다는 점이다.

이런 약점을 이용한 자치단체의 공무원들이 건축허가를 남발한 것이다. 문화재 보호법이 미비한 탓에 법망을 피해 건축허가를 내줄 수는 있지만 민족의 문화유산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는 사람은 법 이전에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 풍납토성을 조사하던 현장이 불이익을 참지 못한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문제를 놓고 학계와 언론계는 정부가 나서 보존방안을 강구하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고, 토지 소유자들의 반발은 한계에 도달해 폭동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유식한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역사유적이라는 감상적인 방법으로는 주민들의 불이익이 보상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명백하게 한 가지뿐이다 유적 전체를 국가가 매입해두는 일이다. 그리고 나서 계획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 예산 타령은 설득력이 없다.

올해 못다 산다면 5년, 10년 계획으로라도 매입 목표를 세워야 한다. 정부가 하다 못하면 학계와 풍납토성 보존을 위한 시민연대도 결성돼 있다.

과거 어떤 정부는 지금은 용도폐기돼버린 댐을 만든다고 국민의 성금을 거둔 적도 있다. 풍납토성 보존을 위해 국가가 의지만 보인다면 머지않아 거족적인 모금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문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존심 높은 국민이 있고, 문화정책을 표방하는 정부가 있다. 양측이 합심해 민족의 문화유산을 살리자. 정부와 서울시의 역사적 결단만이 남았다.

김병모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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