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로비 룰 만들어 도입 결정 투명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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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온 나라가 로비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국방부의 무기도입 의혹에 이어 경부고속철도와 관련한 로비 사건이 터졌다.

무기구입의 경우 UH60 헬기의 고가 구입 문제, P3C 대(對)잠수함 초계기의 커미션 등으로 시끄럽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 로비 의혹이 다시 제기된 것이다. 이제 국민은 로비라는 말만 들으면 으레 비리를 연상하게 됐다.

외국에서는 로비란 자신이나 그가 속한 그룹.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책결정자에게 접근해 자신에게 유리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도록 설득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로비란 정책결정자의 금전수수 같은 범죄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런 행위는 어느 나라에서도 금지돼 있다.

미국의 경우 로비는 헌법상 국민기본권 중 하나인 청원권으로 보고 있다. 납세자인 국민은 정부에 대해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이 권리의 행사가 로비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믿고 있다.

또 어느 나라건 입법활동이 있는 한 로비가 있게 마련이고, 거액의 상권이 움직이는 경우 더욱 배제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특히 미국에선 많은 사람이 로비를 공개하지 않으면 지하로 들어가 더 큰 사회적 폐해가 생긴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로비가 공개적으로 진행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누구나 정해진 규칙만 지키면 외국인이라도 로비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제도다.

이처럼 로비가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로비스트로서 한국을 방문해 특정 기업의 이익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수년 전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국가원수가 우리나라에 고속철도를 팔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펼친 바도 있다.

한국의 여론 역시 국익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로비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쪽인 것 같다. 1980년대 한.미간 통상 문제가 한창 국민의 관심사가 됐을 때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대미(對美) 통상 로비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대만, 그리고 일본의 대미 로비를 본받아야 한다고들 말했다.

하지만 로비활동을 합법적으로 하라는 말이지, 돈이나 향응 또는 미녀를 동원하는 구(舊)시대의 로비를 하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로비와 범죄행위는 엄격히 분리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지금 국내에 불붙은 로비 논쟁의 초점을 건전한 로비문화를 어떻게 정착시켜 효율적으로 무기를 구입하느냐에 맞춰야 할 것이다.

건전한 로비 문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우선 로비를 하나의 제도로 용인할 건지, 아니면 지금처럼 방치할 건지를 정해야 한다. 용인한다면 로비의 규칙을 만들어 그 틀 안에서 로비가 이뤄지도록 함으로써 범법자들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로비의 규칙이 생길 때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우선 우리 정부는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이 높아질수록 외국 무기상의 로비활동은 더욱 공개적.경쟁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외국업체와의 상담에서 현재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게 된다.

둘째로 무기도입 계획은 정부가 수립하고, 구입은 지금보다 민간이 더 많이 담당토록 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볼 만하다.

이 경우 국가 비밀의 유지가 우려될지 모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부의 무기구입 과정에서 비밀은 결국 노출되게 마련이다. 국가의 비밀은 구입 자체보다 구입 후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무게의 중심을 둬야 할 것이다.

이번에 불거져 나온 무기구입 의혹 사건이 투명한 로비 활동과 무기 구입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정재영 <성균관대 교수.국제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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