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2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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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25. '공주병 시인' 허수경

여느 여자 문인들에 비해 키가 좀 컸던 신경숙씨는 몇 번이고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좌중에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감동한 눈치였다.

누군가가 촌에서 갓 올라온 소박한 누이 같다고 말했던 터라 모두 그렇게 멋지고 세련되게 노래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

잔잔하게 잦아들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 노래는 가사의 아름다움과 함께 모두를 참으로 조용하게 만들었다.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로 매듭 지은 노래를 들으면서 신예 소설가 앞에도 정녕 새로운 날이 오고 서울살이의 낯설음이 안개 사라지듯 사라지기를 일행들은 절실하게 빌어주는 것처럼 엄숙해졌다.

허수경 시인은 당시 실천문학사에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이후 탑골을 마치 학교처럼 찾아왔다.

처음에는 송기원 시인이나 이시영 시인하고 같이 왔지만 뒤에는 스스럼없이 찾아와 친동생처럼 살갑게 행동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술을 잘했다.

주로 소주를 마셨는데 술을 마실수록 말이 없어지다가 나중에는 혼자 홀짝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신이 슬픈 이유를 설명했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자기가 너무 예뻐 사람들이 시기한다' 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법이지만 허시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소 황당했다.

키는 작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주근깨도 몇 개 있는데다 쌍꺼풀 없는 소박한 눈을 가진 허시인인지라 마음의 아름다움이라면 모를까 외양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인정하는 것은 허시인의 노래솜씨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잔잔하게 시작하는 양희은의 '한계령' 이나 잘 익은 젓갈같이 몸에 척 들러붙게 만드는 '진주난봉가' 는 일품이었다.

그런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들은 허수경 시인에게 흠뻑 빠져든 표정이었는데 이를 두고 자신이 예쁘다는 근거로 삼은 것은 아닐지. 그런데 그런 예쁜 모습도 잠시, 누군가가 "너 예쁘다" 거나 "너 시 좋더라" 라고 말하면 참지 못했다.

"내가 어디가 예쁘다고 생각하느냐" 혹은 "당신이 내 시에 대해 정말 아는 거야" 라는 식의 말도 서슴없었다.

한마디로 당차고 씩씩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과 가벼운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늘 우는 것은 허수경 시인의 몫이었다.

고향 진주에서 갓 올라온 '어린 소녀' 인 처녀 시인이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세계를 다지려는 몸부림이었음을 뒤에는 알게 되었지만 당시는 왜 그렇게 못 참을까 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92년 가을 독일로 홀연히 떠나 마르부르크 종합대에서 고고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뮌스터에서 근동고고학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잡지를 통해 읽으며 나는 허수경 시인이 자기가 예쁘다고 한 말을 조건 없이 인정한다.

국문학과를 나온 가난뱅이 처녀 시인이 혼자서 유학을 떠나 힘든 공부를 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커보이고, 그런데도 그 일을 용기있게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복희 <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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