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세 스승찾은 칠순 '노제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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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제자 넷이 스승의날을 하루 앞둔 14일 다정한 자매처럼 카네이션 바구니를 들고 경기도 수원시 장안동 실버타운 유당마을을 찾았다.

이곳에 은사 최은경(崔恩卿.97.여)선생님이 계시기 때문. 황해도 해주행정고등여학교 졸업생 吳희성(79.5회).姜숙영(78.6회).安복순(78.6회).林인순(75.9회)씨가 매년 스승의날을 맞아 崔선생님을 찾은지 벌써 50여년.

"일제치하 당시 한국인 선생님은 남자 체육선생님과 崔선생님 두분 뿐이었지요. 선생님은 저희들이 조선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것과 현모양처가 될 것을 누누이 강조하셨죠. 선생님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새겨왔기에 그때 그 시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언제나 꿈많던 여고생 시절로 되돌아간다는 이들은 1947년 崔선생님의 월남 소식을 전해듣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은사를 찾았다.

이후 이들은 제자들이 갹출한 용돈과 꽃을 들고 매년 은사를 찾아 '사제지정' 을 '모녀지정' 으로 꽃피우고 있다.

"아직 스승의 은혜에 절반도 보답하지 못했다" 는 제자들을 맞는 崔선생님도 "이젠 이들이 딸이나 다름없다" 며 반겼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崔선생님은 1932년 해주행정고녀 개교와 함께 첫 교편을 잡았다.

이후 15년 동안 이 학교에서 가사 과목과 기숙사 사감을 맡으면서 엄한 '어머니' 역할까지 해냈다.

가족과 함께 월남한 그는 전남 완도중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 53년 퇴직했다. 외아들은 한국전쟁때 북한군에게 납북됐고 60년 남편마저 세상을 떠난 뒤 친척집에 머물다 88년 지금의 양로원으로 옮겨 왔다.

崔선생님의 마지막 소원은 납북된 아들(安병도.24년생) 얼굴을 한번 만져보는 것.

崔선생님은 "남북이 화해한다는데 올해는 좋은 소식이 있을 것" 이라며 가족 상봉을 한껏 기대하고 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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