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에 이는 '제2의 벤처 물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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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상아탑에 벤처 바람이 거세다.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까지 발벗고 나서서 실험실과 강단을 맴돌던 창의력.아이디어를 들고 창업전선에 나서고 있다. 벤처 인력을 배출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대학 스스로 벤처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일 밤10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36동 310호 연구실. 10여명의 젊은이들이 며칠째 밤을 새며 머리를 맞대고 있다.

첨단 무인조종 비행체를 만드는 '스페이스 로보틱스' 사의 연구실이다.

헬리콥터 모양의 비행체에 카메라나 센서를 달아 원격 검사는 물론 군사용으로도 쓸 수 있는 장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기공학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조금배 사장은 "비행체에서 원격 촬영한 동영상을 자동 추출해 판매하는 기술과 군사용으로도 쓸 수 있는 무인항법시스템 등 세계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다" 며 "6월로 예정된 제품 발표회를 앞두고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라 밤새는 일은 보통" 이라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공학연구센터 1층 '애니뮤' 사무실. 학부생 5명이 음악과 관련된 인터넷 사업을 해 보자며 지난해 11월 창업했으며, 이 가운데 2명은 '연구에 전념하겠다' 며 아예 휴학계를 냈다.

3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문성기씨는 "회사가 안정될 때까지 누군가 집중적으로 매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휴학했다" 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최근 대학가에 불어닥친 벤처 열기는 1세대 벤처가 잇따라 창업됐던 90년대 초에 이어 두번째. 당시와의 차이점은 벤처기업 이미지가 향상돼 우수 인력이 대거 몰리는 데다, 대학당국과 정부가 나서서 지원하는 등 창업 여건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

90년대 초부터 휴맥스.우리기술.파인디지털.기인텔레콤 등 유명 벤처기업의 산파역을 맡아온 서울대 권욱현 교수는 "당시엔 사회적 인식의 벽과 자금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고 말한다.

그는 "결혼을 위해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결혼 후 벤처기업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다" 며 "지금은 창업을 위한 여건과 기반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고 말했다.

학생들도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보다는 벤처 창업이 훨씬 낫다" 고 입을 모은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김정호 박사는 "기존 연구소나 기업이 보유한 기술은 이미 대부분 사업화된 만큼 새로운 기술로 창업하는 대학 연구소들이 앞으로 정보통신 분야 기술혁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현실과 동떨어진 대학 교육 때문에 기업이 졸업생들을 채용해도 항상 재교육이 필요했는데 최근 실용성 있는 연구가 강조되면서 대학의 교육방법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의 지나친 상업화에 따른 문제점과 갈등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기초 연구보다는 실용화에 우선 매달리다 보면 대학 본연의 연구.학술활동이 위축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연세대 일부 창업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교수들이 연구분야와 무관한 사업 아이템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 불평한다.

창업에 몰두하는 교수가 늘어나고 대학원생들이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동원되는 일이 많아 연구실의 질적 저하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창업열기를 우려하는 교수들도 있다.

서울대 전기공학부의 한 교수는 "졸업 논문을 위한 면담 약속을 번번이 미루는 학생이 있었다" 면서 "알고보니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졸업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고 말했다.

뚜렷한 기술기반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벤처 창업에 나설 경우 실패할 확률이 높은 만큼 대학이 별다른 마찰 없이 이들을 다시 수용하는 것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승녕.최지영.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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