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포커스] 사건이 사건을 덮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린다 김의 '몸로비' 의혹으로 장식되던 신문이 하루아침에 최(최만석).호(호기춘).강(강귀희)의 '철로비' 의혹으로 뒤덮였다.

야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것을 가리켜 "사건이 사건을 덮었다" 고 표현했다.

실제로 그동안 정치와 언론의 역학관계를 관찰하다 보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사건으로 사건을 덮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목격된다.

여간해서 걷잡기 힘든 불은 폭탄을 투하해 끈다는 이야기가 있듯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사건의 파장을 줄이는 데는 또 다른 사건을 폭탄마냥 던지는 것이 즉효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폭탄이 터질 때 순간적으로 산소를 흡입해 그 화학적 반응작용으로 불길을 잠재우는 것처럼 특정 사건에 집중된 관심을 또 다른 사건으로 분산 혹은 함몰시킨다는 논리다.

언론의 생리는 새로운 사건을 물게 마련이다.

새로운 것을 물려면 입에 물고 있던 것을 삼키거나 뱉어버려야 한다.

사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언론의 생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언론은 결코 사건이라는 뼈만 물고 있는 개가 돼서는 안된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사건사-국면사-구조사' 로 연결되는 역사전개의 역동성을 이야기했다.

신문은 분명히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일정하게 국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론으로서의 신문은 그 변화무쌍한 사건-국면-구조의 역동적 과정을 끝까지 주목하고 추적해 역사속의 파수꾼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미디어 환경이 급변해도 신문의 존재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은 사실에 입각해 실체적 진실에의 규명을 제일의 존재이유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린다 김 사건이 아무리 매혹적인 로비스트가 등장하는 몸로비 사건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문제의 본질이 흐릿해져 왔다 해도 그것이 단순 스캔들이 아님을 삼척동자도 안다.

이양호(李養鎬) 전 국방장관이 갑자기 입장을 바꿔 '부적절한 관계' 를 시인하며 사태의 성격을 '장관과 미모의 로비스트 간의 스캔들' 로 한판 뒤집기를 시도하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사실 린다 김 사건은 애초부터 고위급 인사들의 애정행각과 도덕성의 문제로만 포커스를 맞출 게 아니었다.

자그마치 2천2백억원이 소요된 통신감청용 정찰기 구입 및 대북 전자전 사업과 관련된 사건이다.

비단 돈 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여전히 군사적 대치상황이 가시지 않은 나라의 안보와 직결된 프로젝트의 문제다.

의당 철저히 규명되고 밝혀져야 할 사건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실제로 단 하루만에 정말 신기하리 만큼 신문에서 실종돼 버렸다.

하루만에 퇴원하는 린다 김을 병원 로비에서 인터뷰한 기사를 마감재로 린다 김 로비 의혹사건은 마무리돼 가는 분위기다.

이래서는 정말 곤란하다.

더구나 린다 김 삼행시(三行詩)가 회자되고, 린다 김 선글라스가 유행할 것이라는 가십성 기사로 마감지을 성격도 아니지 않은가.

린다 김 로비 의혹 사건 보도에 있어 중앙일보는 '국민의 알 권리' 와 '개인의 사생활 보호' 이 두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자세를 지키겠다고 언명한 바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끝까지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겠다" 는 다짐의 다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문이다.

'몸로비' 사건을 흐지부지 끝낸 신문이 '철로비' 사건을 제대로 파헤치리라고 누가 믿겠는가□ 더 이상 사건이 사건을 덮어버리는 하루살이 언론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도 이제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쳤던 워싱턴포스트와 회사의 존립을 걸고 펜타곤 페이퍼를 공표했던 뉴욕 타임스 같은 신문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정진홍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커뮤니케이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